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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궤도 (Life Track,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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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왠만한 영화들은 대부분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합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 때로는 감정의 미세한 결을 관찰하며 특정 인물과 상황 속에 몰입한다는 것이 연출자와 관객들 간의 암묵적인 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변칙적인 시점 선택을 통해 새로운 영화 체험 방식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 본 스페인 공포영화 <알.이.씨>(2007) 는 등장 인물 중 한 사람인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방송용 카메라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였습니다. 낡은 아파트 안에 갇힌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좀비가 되어가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자는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그 효과의 성공 여부는 관객들마다, 그리고 장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요)

영화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궤도>는 독특하게 설정된 카메라의 시선 자체가 플롯 구성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궤도>의 시점도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입니다. 상대방 배우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을 주인공인 것처럼 마주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궤도>의 1인칭 시점은 특정 인물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양 팔이 없는 철수(최금호)가 자신의 발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장면이 철수 자신의 시선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철수가 밖으로 나왔을 때 철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저 아랫 동네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끌고 온 호기심 많은 꼬마입니다. 그러니까 <궤도>의 시선은 등장 인물 중 그 누구의 것이든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궤도>의 장면 속에 어떤 인물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그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네가 나를 보고 있음에 비로소 내가 보여질 수 있다는 뜻일까요. 카메라의 시점 자체에 존재론적인 의미를 담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궤도>는 이 독특한 시점의 활용과 그것이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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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팔이 모두 없는(정확히는 어깨부터가 전부 없기 때문에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장승처럼 보입니다) 철수는 약초를 뜯어다가 파는 것으로 연명을 하며 사는 남자죠. 유일한 낙이라곤 이따금 통기타로 "푸른하늘 은하수"를 연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타를 눕혀놓고 양 발가락으로 연주를 합니다. 어느 날 그 집에 귀머거리 처녀 향숙(장소연)이 찾아와 대충 함께 살게 됩니다. TV에서 사스(SARS)와 살인사건 관련 뉴스가 나오고 경찰이 왔다 가는 동안 향숙이 숨어있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일이 꼬여 도망을 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양 팔이 없는 남자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여자의 만남. 저는 <퐁네프의 연인들>(1991)과 같이 인생의 밑바닥으로부터 건져올린 또 한 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생각했습니다. 철로변도 자주 나오고 영화 제목도 "궤도"니까 적당히 보편적인 삶의 성찰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겠거니 했었지요. 실제로 마지막 10분 전까지 영화는 딱 그런 정도의 줄거리와 두 주인공의 관계 맺음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10분이 항상 문제입니다.

철수가 이따금씩 꾸던 꿈이 예상 밖의 결말을 암시하는 떡밥이었을 줄이야. 꿈 속의 여인은 철수의 죽은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였습니다. 자신을 두 팔이 없는 병신으로 낳아준(또는 어린 시절에 그런 사고를 당하게 만든) 어머니. 철로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무한한 자애로 넘치고 있었지만 어린 철수는 그런 어머니의 죽음을 방치하고 맙니다. 어머니가 자살을 한 것인지 아니면 향숙이와 같은 귀머거리였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그와 같은 철수의 과거사가 밝혀지는 지점이 곧 영화의 결말이 됩니다. <궤도>의 독특한 1인칭 시점도 철로변에서 철수 자신을 바라보는 향숙의 모습을 마지막 컷으로 남긴 채 끝을 맺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의 두 남녀를 통해 순도 높은 사랑의 정의를 되새기거나 열차와 선로를 상징으로 활용해 인간 관계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일 것으로 예상되었던 <궤도>는 불구의 몸과 마음을 안고 성장해온 한 인물의 비극적인 과거사와 마지막 순간에 관한 작품이 되고 맙니다.

공동 제작자로 참여한 장 률 감독의 <망종>(2005) 도 매우 비극적인 결말의 작품이긴 했습니다만 <망종>에서는 최순희(류연희)를 통해 중국 내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는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었습니다.(물론 그 개인사만으로도 정서적인 울림을 주기에는 충분했죠) 그러나 <궤도>의 결말은 그 짧은 순간에 보편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영화 전체를 철수라는 특정 인물의 이야기로 뒤바꿔버립니다. 그러니가 <궤도>에서의 삶의 궤도는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보편적인 궤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철수 개인의 시작과 끝의 궤도입니다. 세세한 상황 설명들을 워낙에 삼가하면서 진행되는 작품인지라 저로서는 철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철로변에서 있었던 일들을 통해 다른 어떤 일반화된 설명이 가능한 것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철로변과 산 중턱의 삶으로 대변할 수 있는 가난과 소외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가 반드시 보편적인 깨달음을 얻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만든 <궤도>의 결말은 그저 먹먹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 아니라 다분히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앞으로 한동안은 철수의 선택에 관한 질문과 해답 찾기를 멈추기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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