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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바시르와 왈츠를 /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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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을 봤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동안 나왔던 많은 호평들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영화였다. 오프닝은 질주하는 개들의 위협적인 모습에서 출발하는데, 사실 개들은 진짜가 아니라 이미 20년 전의 전쟁에서 죽어 사라진 존재들이다. 명령을 받고 개를 죽인 이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악몽을 꾼다. 친구의 이러한 이야기를 듣던 영화 감독 아리는 그와 함께 참전했던 레바논 전쟁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대해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기억이라는 테마를 다루면서도 기억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특히 전쟁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끔찍한 경험은 기억을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게 만든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인 이스라엘 군인들은 실질적인 가해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피해자라는 오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하기에 앞서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조차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당시에 현실을 살아갔던 게 아니라 전쟁의 감각만을 느끼는 상태였던 것이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리얼리티는 환상으로 비틀리게 된다. 바다에서 나타난 거대한 여인 같은 왜곡된 기억을 들으며 주인공 아리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기억이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의심한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인물들의 무의식 속에 새겨진 기억들을 자유롭게 드러낼 때 가장 폭발력을 가진다. 압권인 부분은 '바시르와 왈츠를' 추는 장면이다. 바시르는 레바논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가 갑자기 암살당하여 팔랑헤 당원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학살을 불러온 인물이다. 바시르의 얼굴이 찍힌 커다란 포스터가 보이는 곳에서 미친 듯이 움직이며 총을 쏘는 병사의 모습은 죽음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성이 파괴되는 순간을 역동적으로 포착한 명장면이다.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애니메이션은 결말에서 실사 장면으로 전환된다. 마지막 장면은 그동안 망각해왔던 기억이 복원되면서 동시에 죄의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혹시 애니메이션으로 찍은 이유가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너무 불편해서 아무도 안 보려고 할까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완성된 영화는 어두운 심연의 세계를 통해 인간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수긍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이다. 현재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아리엘 샤론은 제외해야겠지만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애니메이션 감독 요니 굿맨과의 대화에서는 이스라엘의 현지 반응에 대한 질문들이 많이 나왔다. 이스라엘에서 영화에 대한 지원도 받았고, 좋은 반응도 얻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바시르와 왈츠를>은 현재의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지만, 지금 개봉 중인 이스라엘 영화 <레몬 트리>와 함께 생각해보면 영화에 대한 규제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잊고 싶은 기억들에 대한 한국 영화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