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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발굴된 과거 DVD> 역사의 화려함과 씁쓸함

학부때 <한국영화사> 강의를 들으며 일제시대 영화에 대한 페이퍼를 쓴 기억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올라있던 1943년 이마이 타다시의 <망루의 결사대>와 45년 최인규의 <사랑의 맹서>라는 영화에 대한 감상이었다. 자막이 없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전영화와 '옛날 외국 영화'가 같이 생각되는 현실에서 "우리 영화도 고전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영화사적으로 1940년대는 국내 영화가 기술적, 산업적으로는 성장했을지언정 '한국영화'라는 범주에서는 심한 왜곡과 굴절을 겪어야 했던 시기였다. 한 편에서는 때문에 이 시기를 한국영화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부인하거나 피할 수 없는 영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식민지 시기를 우리 역사에서 뺄 수 없듯이 말이다. 더구나 영화 역사 100년을 자랑하면서도 식민지와 전쟁으로 대부분의 필름들이 없어져 볼 수 있는 초창기 영화들이 몇 개 되지 않아 아쉬움이 더 크다.(신문시가에 의하면 보관, 관리 개념이 없었던 당시 사람들이 필름을 밀짚모자 테를 두르는데 썼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영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적은 편이다. 아프고 감추고 싶은 기억을 굳이 영화로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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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의 고전필름을 찾기 위한 노력은 비워있던 역사를 채워넣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미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46년 최인규의 <자유만세>와 같은 영화들이 디지털로 복원되는 등 역사채우기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그리고 2004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 수집한 해방 전 1940년대 영화 4편이 작년 10월 DVD로 출시됐다. 41년 최인규의 <집 없는 천사>, 41년 안석영의 <지원병>, 41년 이병일의 <반도의 봄>, 그리고 43년 박기채의 <조선해협> 4편이 묶인 DVD 세트의 이름은 <발굴된 역사>. 영상자료원의 복원 작업과 꽤나 어울리는 타이틀이다. 검은색 전면에 카메라를 비춘 듯한 작은 원 안에 담긴 흑백 영상 화면이 타이틀 디자인이다. 왠지 우울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엿보이는 포장이다. 게으른 탓에 구입한 지 한참되는 DVD 타이틀을 이제서야 꺼내 봤다. 생각보다 화면과 사운드가 깨끗해서 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당연히 우울한 시기에 만들어진 어용영화 네 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내용이나 구성면서에 장르적 공식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영화 4편을 보고나면 왜 당시 사람들이 '문예봉'이라는 여배우에게 열광했지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집 없는 천사>

최인규 감독의 1941년 <집 없는 천사>는 도시에서 앵벌이로 살아가는 아이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향림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운 방성빈 목사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했던 다른 감독들과 달리 순수 국내파였던 최인규 감독의 배경 때문인지 계몽주의 색채가 강하면서도 이야기 구성에서 있어는 토속적인 색깔이 짙게 베어난다. 엿을 몰래 사먹은 벌로 앵벌이 두목에게 위기에 몰린 용길, 명자 남매가 향림원에서 극적으로 재회하는 설정, 그들을 뒤쫓는 두목이 개연성 없이 착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변하는 설정까지 고전소설 속의 '우연성'과 '권선징악'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계몽영화에 속한다. 삶의 목적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향림원을 통해 노동을 익히고, 협력을 배우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의 전형적인 계몽 스토리다. 영화의 마지막에 뜬금 없이 황국신민선언을 제창하고 일장기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식민지 시대를 어렵지 않게 짐작케 한다. 한국의 네오리얼리즘이라는 평론가들의 평가답게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면서도 우울한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해방 후 "감독으로서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일본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감독의 변명이 진심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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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봄>

이병일 감독의 데뷔작인 <반도의 봄>은 194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무색할 정도로 식민지 상황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다. 오히려 당시 한국영화인들이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요소들을 가득 안고  있다. 이 시기는 한국영화사의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영화가 '혁명의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던 '카프'계열의 영화인들의 꿈이 일본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산산히 무너지고 영화시장의 기업화와 대형화가 시작된 것이다. 현재의 영화사들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많은 영화인들이 영화가 자본으로 만들어진다는 현실에 대한 일본의 영화시스템을 끌어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마치 주인공이 마지막 일본으로 영화 유학을 떠나는 것처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화가 <반도의 봄>이다. 영화 <춘향전>의 제작비가 부족해 중단 위기에 몰리자 주인공 영화제작자(김일해)가 돈을 대주고 있던 레코드 회사의 공금을 빼돌리게 되고, 곧 적발돼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막 창립된 반도영화사의 도움으로 춘향전이 완성되고 큰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이 기본 스토리다. 여기에 영일, 정희, 안나의 삼각관계가 극의 주된 갈등을 제공한다.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병일 감독은 화면, 편집, 구성 등에서 장르영화의 공식을 적절히 사용하며 극을 이끌고 있다. 영화에 대한 영화를 하며 영화작업을 위해서는 '회사'가 필요하다는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게 들릴 말을 영화로 풀어낸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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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

<반도의 봄>에서 언급한 카프의 변화를 경험적으로 증명해주는 영화가 <지원병>이다. 이 영화는 카프의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안석영이 만든 대표적인 친일 영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급격한 이동이 오늘의 일만은 아닌듯하다. 영화는 일본군이 되고 싶어하는 조선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의 농촌에서 약혼녀와 땅을 일구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주인공에게는 더 큰 꿈이 있다. 그것은 일본의 군인이 되어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 그는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지만 전혀 게의치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인물들은 그가 일본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죽고 마름자리를 바꾸려던 지주 역시 그의 선택에 감복해 남아있는 가족들을 보살필 것을 약속한다. 이렇듯 영화는 이전 두 편의 영화와 달리 적극적이고 본격적으로 일본의 편에 설것을 강요하고 있다.  남아 있는 가족은 국가가 책임질 터이니, 조선의 청년은 충성심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싸우라는 강한 파시즘적 메시지다. 어찌 됐든 힘들게 영화작업을 했던 조선 영화인들에 대한 연민과 그 때문에 자본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안석영의 변화는 당대의 슬픈 현실을 대변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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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해협>

1943년 박기채의 영화 <조선해협>은 최인규의 <사랑의 맹서>처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군이 되길 부추기는 어용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어용단체가 영화제작을 독점하게 되면서 한국영화가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나오는 영화 족족 내선일체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조선해협>의 줄거리는 일본군에 지원하는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여인 금숙과 살면서 가족과 남처럼 지냈던 주인공 성기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형의 영정 앞에서 자신도 일본군에 지원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 결정 하나로 그간의 가족과의 갈등은 한 순간에 봉합된다. 금숙 역시 군에 지원하기 위해 자신을 떠난 성기에게 자신의 임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주인공 성기가 전쟁터로 가고 손자가 있다는 사실에도 눈한번 꿈쩍않던 아버지는 총후부인이 되어 자신의 건강을 헤치면서 까지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금숙을 보고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태평양 전쟁 중 조선인의 군대 지원을 강요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멜로 드라마의 장르적 속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영화를 정치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했다고 한다.) 특히 성기와 금순의 사랑이 주된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지금봐도 어색하지 않은 영상들이 놀랍기도 하다. 금순과 성기의 전화 통화를 파도로 연결하는 장면, 전쟁터의 총성과 금순이 재봉질을 하는 장면과 연결시키는 시퀀스 등 화려한 교차편집 역시 볼만한다. 분명 일본 유학파인 박기채 감독은 보다 장르영화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국내파였던 최인규 감독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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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영화를 보고 나니 놀라움과 씁쓸함이 겹쳤다. 놀라움은 생각보다 예상보다 "영화적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집 없는 천사>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다른 당시 조선의 리얼리즘이 무었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한 감독의 작품들에게서는 헐리우드 장르 영화에서 봐왔던 장치들이 극의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조절하고 있었다. 지금봐도 어색하지 않은 편집과 구성이다. 과연 이후 신상옥, 유현목, 임권택으로 이어져 지금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초가 된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재미와는 별개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석영의 예처럼 많은 조선 영화인들은 시대적 운명 속에서 친일의 색채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타의에 의한 것일수도 자의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직후 자유만세와 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식민지 당시 어쩔 수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영화인이 영화를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감독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은 문예영화였다. 선전성을 약하게 하는 대신 예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독들이 시대적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군사정권 때도 영화인들이 이러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계몽영화는 더욱 그렇다. 일본의 식민지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뚜렷한 구분이 생긴다. 무력항쟁처럼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민족주의 좌파와 우선 조선인들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민족주의 우파가 그것이다. 비극은 민족주의 우파에서 시작됐다. 조선인들의 계몽은 달리 말하면 조선이 미개한 상황에서 벗어나 일본과 서양의 신식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이들의 주장은 일본의 '대동아'에 흡수된다. 강대국들과 싸워 승전하는 일본의 모습에 우파 지식인들은 일본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광수의 변심 역시 이러한 맥락이다. 영화 역시 다르지 않다. 시대적 책임에 침묵하고 있었던 문예영화와는 다르지만 계몽영화 역시 그 의도와는 다르게 친일의 때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인들의 다른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방 후 친일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면서 영화 쪽도 같은 입장에 처혔다. 네 편의 감독들 모두 한국영화계를 이끌며 많은 작품을 찍고 후배 영화인들을 양성했다. 해방 조선에서의 그들의 활동과는 별개로 식민지에서의 활동 역시 명과 암이 구별되어야 한다. 지금은 이런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영화계에서도 과거가 현재의 빛이 되는 모습을 기대한다.

P.S. 문예봉이 나오는 영화를 더 찾아 봐야겠다. 북한 영화들을 좀 뒤져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