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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CHIFFS 2008] 뜻밖의 즐거움, 제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지난해보다 더욱 화려해진 모습으로 막을 연 제2회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개막식 때 보여준 지나친 정치적인 성격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프로그램 내용 자체로는 매우 만족할만한 영화제였다. 대중적인 영화제를 지향한다고 했지만 온갖 고전들로 가득한 상영작 목록은 언제나 영화에 목말라 있는 씨네필들에게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올해 영화제는 좌석점유율에 있어서도 78%를 기록했던 전년도에 비해 5.4% 늘어난 83.4%를 기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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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가와 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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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이번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은 총 10편. 그 중 네 편은 ‘이치가와 곤 감독 특별전’ 상영작이었다. 안 그래도 올해 봄 이치가와 곤 감독의 타계 소식을 들었기에 그의 영화를 볼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네 편의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이누가미 일족>이었다. 만화 ‘소년 탐정 김전일’을 보면 김전일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탐정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바로 그 탐정이 <이누가미 일족>의 주인공인 긴다이치 코스케다. <이누가미 일족>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서막을 알린 작품인 동시에, 이치가와 곤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돋보이는 추리영화다. 평소에는 어수룩해 보이지만 수사를 할 때만은 진지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모습은 영락없는 김전일 판박이다. 그의 독특한 매력을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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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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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초기작품인 <버마의 하프><불꽃>도 빼놓을 수 없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승려가 된 병사의 이야기를 그린 <버마의 하프>,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 금각사를 배경으로 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영화화한 <불꽃>은 이치가와 곤 감독이 얼마나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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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가와 곤 이야기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이와이 슌지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이치가와 곤 이야기>였다. 이치가와 곤 감독의 탄생부터 2006년 아직 그가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 흔한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엔 몇 장의 사진과 이치가와 곤 감독 영화의 장면들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것들을 가지고 정성스레 편지를 쓰듯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해냈다. 여전히 변함없이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어, 보고 있으면 어느 샌가 콧등이 시린 감동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치가와 곤 감독과 그의 부인이자 각본가였던 와다 나토와의 이야기는 마치 <러브 레터>나 <4월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감성이 묻어나, 역시 이와이 슌지 감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 이치가와 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을 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이야기가 잘 통해서 반가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영화를 가장 많이 본 나로서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영화에 있어서 내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왠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고백은 이치가와 곤 감독에 대한 그의 애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예상치 못했지만 아마도 올해 충무로영화제 최고의 발견은 바로 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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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네 편은 칸 감독주간 특별전 상영작들이었다. 칸 감독주간은 68혁명의 영향으로 생긴 칸 영화제의 가장 혁신적인 섹션으로, 그 시대의 가장 새로운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문이다. 감독주간 40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40X15: 칸 감독주간 40년의 기록>은 그런 감독주간을 가장 친절히 설명해주는 다큐멘터리다. 초기 집행위원장인 피에르 앙리 드로부터 현 집행위원장 올리비에 페레까지 그 동안 칸 감독주간을 이끌어온 사람들의 인터뷰와 감독주간을 통해 이름을 알린 감독들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40년 동안의 업적과 성취를 차곡차곡 담아냈다. 짐 자무시, 에릭 쿠, 가와세 나오미, 토드 헤인즈, 미카엘 하네케, 봉준호 등 좋아하는 감독이 나올 때마다 느끼게 되는 흥분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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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악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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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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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


그밖에 본 세 편의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아마도 악마가>, 마이클 피기스 감독의 <폭풍의 월요일>, 토드 헤인즈 감독의 <세이프>였다.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악마가>를 무척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무척 건조한 느낌이라서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젊은이가 겪게 된 공허함을 그린 이 영화는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긴장이 녹아 있다. 그것은 혁명 뒤의 공허함을 얘기하는 이 영화의 염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전해주는 지독한 냉소만큼은 잊을 수 없는 영화였다.

<폭풍의 월요일>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출한 마이클 피기스 감독의 데뷔작으로, 영국 뉴캐슬 지역을 재개발하려는 미국인 코즈모의 음모에 두 남녀가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에서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센슈얼한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노동자 남성과 미국 출신의 가난한 웨이트리스 여성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간도 함께 지니고 있는 영화다. 특히 가수 스팅이 재개발에 끝까지 반대하는 클럽 사장으로 등장해 멋진 연기와 동시에 자신의 본업이 베이스 실력을 멋들어지게 선보이기도 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세이프>는 제목처럼 가장 안전한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 처한 아이러니함을 그린 영화로, 줄리안 무어가 화학약품으로 인해 병을 앓게 되는 주인공으로 등장해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아름다운 그녀가 점점 핼쑥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여성적인 섬세함이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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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퍼 하우저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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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황소


나머지 두 편의 영화는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카스퍼 하우저의 신비>와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다. 먼저 <카스퍼 하우저의 신비>는 1828년 독일에서 발견된 한 청년의 실화를 담은 영화로, 인간 세계 바깥에서 성장해온 카스퍼 하우저를 통해 인간 이성의 허점을 비판하고 있는 영화다. 만약 영화를 보면서 카스퍼 하우저의 엉뚱한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면, 그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카스퍼 하우저의 엉뚱한 행동들을 통해 이성과 비이성의 기준에 대해 역으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카스퍼 하우저는 인간 세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의 신체를 해부하여 그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한 이성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한다. 그가 ‘정상’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푸코의 사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마틴 스콜세지<성난 황소>는 개인적으로 마틴 스콜세지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영화다. 복서 제이크 라모타의 생애를 그린 이 영화는 권투를 통해 성공을 쟁취한다는 감동이 아닌, 자신의 폭력성으로 인해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보는 주인공의 인생역정을 그리고 있다. 폭력 속에서 인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개인의 이야기는 <좋은 친구들>과 <카지노>를, 성공을 이뤘으나 행복하진 못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에비에이터>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로버트 드 니로는 50파운드나 되는 체중을 늘려가며 열연을 보여줬다. 철장 속에 갇혀 울부짓는 제이크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영화다. 한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가 인용한 장면이기도 하다.

‘창조, 복원, 발굴’을 내걸고 고전영화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는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대중적인 영화제라는 목표의 구체적인 상도 아직 불확실하고, ‘국제영화제’를 지향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특정 지역의 축제에만 머물고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 사실 때문에 1회 영화제 때는 솔직히 별로 지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 영화제를 통해 그래도 1년에 한 번쯤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맘 편히 영화제를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겪게 될 시행착오들을 통해 더욱 성숙한 영화제로 거듭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