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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사과 (Sa-Kwa, 2005)



문소리와 김태우가 주연한 멜러 영화 한 편이 오래 전에 개봉일을 잡았다가 취소된 이후 그대로 묻혀버리는가 했었는데 이렇게 늦게나마 정식 개봉이 되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네요.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2004년, 그리고 2005년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니 거의 4년 만에 빛을 본 셈입니다. 4년이면 감독이 직업을 바꿨을 수도 있고 배우가 은퇴를 했을 법도 한 시간인데, 늦은 개봉을 위해 배우들이 포스터를 새로 찍고 강이관 감독도 영화 잡지에 인터뷰를 했더군요. <사과>는 10월 중순에 개봉한 작품이라 더이상 상영하는 곳이 없을 줄 알았는데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계속 상영 중이더군요. 그것도 1관에서 상영 중이라 마음이 느긋해져서 관람할 수가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막연하게 최근에 본 문소리 주연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보다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겠거니 했었는데, 집에 와서 문소리의 필모그래피를 확인해보니 아이고 맙소사입니다. <사과>가 만들어진 시점은 <가족의 탄생>,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그리고 <사랑해, 말순씨>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네요. 그러니까 2003년 <바람난 가족>와 이듬해 <효자동 이발사>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시는 한국영화가 적어도 국내 시장에서 만큼은 외화들을 밀어내고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때였죠. 그 틈바구니에서 상업성이 없어보인다는 이유로 <사과>는 빛을 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시절이 바뀌어 한 해에 만들어지는 한국영화 편수가 얼마 되지 않게 되자 창고를 무덤 삼아 누워있던 좋은 작품이 부활의 영광을 안게 된 거죠. 이런 사정은 2006년작으로 지난 주에 개봉한 배형준 감독의 <소년은 울지 않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률 감독의 숨이 턱턱 막히는 영화(<중경>)를 보고 난 이후라서 그런지 <사과>의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들이 너무 반갑게 느껴지더군요. 영화는 오랜 연애(이선균)가 갑작스럽게 끝나버리는 시점부터 시작해 새로운 사람(김태우)을 만나고 결혼해서 살아가다가 애까지 낳아놓고 중간에 방황도 좀 하는 얘기입니다. 특별히 뭔가를 풍자하고 있는 코미디 영화도 아니요 가을용 신파 영화도 아닐 뿐더러 관객들의 상식에 도전하는 날 선 주제 의식의 영화도 아닌, 자극이 될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도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고 영상도 특출난 데는 없지만 내용 만큼이나 편안해서(저예산 영화, 디지털 영화에 대한 편견은 이젠 정말 뚝! 입니다)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더군요. 그러나 이런 '무자극성' 영화를 보다보면 다른 매체에서는 보기 힘든 뛰어난 연기력의 전업 영화배우들을 볼 수 있다는 점 외에 도대체 TV 드라마류와는 무엇이 다른가, 왜 하필 영화로까지 만들어져야만 했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새로 만들어진 <사과>의 포스터는 한 여자와 두 남자 간의 삼각 로맨스물처럼 보입니다만 실제 영화는 전적으로 주인공 효정(문소리)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효정을 제외한 다른 인물이 따로 등장하는 장면은 정말 단 한 장면도 없더군요. 이 여자의 사정과 그 남자의 사정을 교대로 비춰주는 그 흔한 일을 한번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사과>는 효정을 비롯한 등장 인물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그들의 입장이나 감정에의 섣부른 몰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너무 흔하디 흔한 줄거리를 더군다나 이러한 방식으로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기술적인 완성도는 꽤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다행히 <사과>는 '사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관객 스스로 완성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결말을 보여줍니다. 효정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로서 한 단계 성장을 하게 되면서 관객들에게는 좋은 메시지를 남겨주게 되는 거죠. 에필로그로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들도 그만하면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