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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arthouse모모

[씨네토크] 오구리 코헤이 감독과 안성기 배우 대담

지난 11월 8일(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오구리 코헤이 감독과 안성기 배우와의 대담이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11월 6일부터 12일까지 열렸던 <오구리 코헤이 감독 영화제> 의 한 행사로 기획된 씨네토크로서, 이 다음날에는 오구리 코헤이 감독과 이창동 감독과의 씨네토크도 열린 바 있습니다. 11월 8일 오후 4:20분, 안성기씨가 출연한 <잠자는 남자> 상영에 이어 진행된 이 씨네토크는 영화 못지 않게 마음 속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영화 <잠자는 남자>는 제목만큼이나 정(靜)적인 영화라서 사실 전날 새벽 3시에야 잠자리에 든 저로서는 다소 무리한 도전인 영화였습니다. 가끔씩 예상치 못한 판타지 장면이 나오기도 했지만, 영화 전체가 고요함과 평온함과 숲과 나무로 이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칸느 영화제에서 좋아할 것만 같은 예술영화같은 분위기랄까...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상영 당시에 감독이 관객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봐 달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물론 인내심을 가지고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기는 합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뭔가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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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씨는 영화 내내 정말로 "잠자는 남자"로만 출연합니다. 정말 끝까지 누워만 있을까 하고 궁금했는데, 식물인간이 된 타쿠지 역의 안성기씨가 영화 중반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잠깐의 움직임이지만 그 움직임을 위해서 정말 많은 준비와 고민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감독님께서는 "고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느낌"을 요구하셨다고 하는데, 그 짧은 동작 하나에 담긴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듯 했습니다.

영화 자체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런 종류의 영화일수록 씨네토크가 꽤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씨네토크에 기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씨네토크에 나오신 오구리 감독님은 영화제 포스터에서 본 젊은 시절의 다소 날카로운 모습과는 달리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부드러운 인상이셨고, 줄곧 겸손하고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면을 종종 보여주시더군요. 임권택 감독과 이창동 감독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계신 일본의 이 거장 감독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을 조용조용한 말씀을 통해서 전해주셨습니다. (감독님의 말씀을 생각나는 대로 아래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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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접하는 영화들은 대개 "움직임"에 충실한 영화들입니다. 따라서, 영화를 보면 움직임에 집중해서 보게 되는데 (액션 영화의 경우는 더더욱)  눈에 보이는 액션과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영화가 끝나 있고, 무언가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머리속에 남는 것이 많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예로 과연 24시간 방영되는 TV 뉴스를 본다고 해서, CNN에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뉴스와 영상을 본다고 해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알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사실만으로는 세상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숲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고 할 때, 숲만을 찍은 경우와 숲에 작은 토끼가 뛰어가는 장면을 찍은 경우를 비교해 봅시다. 우리가 숲을 집중해서 보게 되는 건 토끼가 있을 때일까요, 아니면 없을 때일까요. 아마도 토끼로 비유된 "움직임"이 없는 경우에, 우리는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고 보다 집중해서 숲을 바라볼 수 있게 되겠지요. 우리는 우리 주변의 너무 많은 움직임들에 주시하느라고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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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질문 시간에는 일본어로 질문을 하신 70세가 한참 넘으신 듯한 한 할아버지가 가장 인상에 남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일본 영화를 많이 보셨고, 안성기씨의 아버님과 함께 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시면서, 관객들 중에 자신과 같은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감정을 공유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뭉클한 말씀을 해 주셔서 씨네토크의 분위기를 더욱 훈훈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구리 감독님도 한일 문화 교류에 대한 애정어린 말씀을 해 주셨는데, 요즘에 한류다, 일본 영화 수입이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치우친 문화 교류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하시면서 "'정치' 관계는 언제든 상황이 변할 수 있지만 서로에 대한 '문화'의 이해를 통해 깊어진 관계는 훨씬 견고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두 나라가 서로의 나라에서 만들어진 진지하고 깊이있는 영화들을  좀더 많이 상영하게 되어, 이를 통해 진정한 만남을 가지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보가 과잉 공급되고 움직임이 포화상태로 넘쳐나지만, 세상을 진정으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매체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구리 감독님의 말씀대로 어쩌면 현대 시대는 영화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한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영상이 줄거리의 노예가 아니라 영상이 줄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영상을 통해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영화를 만드는 이 거장 감독에게 다시 한번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영화 <잠자는 남자>는 우리들로 하여금 잠시 멈추고 삶을 조용히 관조해 보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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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영화제 동안 많은 작품을 본 것은 아니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죽음의 가시>였습니다. <잠자는 남자>를 보았을 때에는 오구리 코헤이 감독이 정적인 예술영화를 만드는 거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자연과 철학을 담아내는 장인 정신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의 가시>를 보면서는 이 분이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도 이토록 뛰어나다는 데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주변 인물이나 주변 상황을 최소한으로 다루면서 단지 두 인물 간의 관계와 인간의 미묘한 감정에만 치중하여 그토록 흡입력있게 영화를 끌어나가는 솜씨는 정말 놀랍더군요. 인간의 애증을 정말 심오하고 강렬한 시각으로 그려낸 걸작으로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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