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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코맥 매카시의 <로드 (The Road)>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로드>. 문명과 자연이 모두 파괴된 지구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담은 소설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나무들마저 말라버리고 바다에마저 생명이 사라졌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아마도 인간들의 어리석은 전쟁의 결과가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지구 멸망 이후의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반복해 왔고, 그 상상력의 가짓수도 꽤나 많이 펼쳐져 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암울해지는 월드 뉴스를 듣고 있노라면 인류 종말의 시나리오는 점점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고, 그러한 설정이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리라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된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문학작품에서 반복되어 온 디스토피아적 세상에 대한 묘사들과 비교해보면, <로드>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별다른 사건도 없이 절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부자의 이야기는 초반에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 남은 식량을 찾아 헤매면서 통조림으로 연명하는 모습은 얼마 전에 읽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작가의 문체에 담긴 매력에 점점 이끌리게 되었다. 세밀한 배경 묘사에 공을 들이는 문체는 핵심을 피해가는 듯 하지만, 그 황폐한 묘사 속에서 우리를 놀래키곤 하는 인간성의 추락과 가끔씩 던져지는 의미심장한 대화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우리를 조금씩 인도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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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이란 편안한 일상에서가 아니라 극한 상황에 내몰릴 때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이며, 생존의 문제가 걸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통해 인간성을 시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눈먼 자들의 도시>와 닮아 있다.) 이 소설은 이야기를 담으려는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논하고자 하는 철학서에 더 가까와 보인다.

문학과 예술에서 논하던 인류의 미덕과 가치가 실종된지 오래이며, 단지 생존만이 최우선의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 정글보다도 잔혹한 세상에서 아버지를 안도하게 하는 한가지 진실은 권총 안에 마지막 순간에 자신과 아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총알 두 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약탈자들과 살인자들이 수시로 출몰하고, 길을 따라서 여행하되 길 위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절대 한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세상에서, 비를 맞으며 숨어서 잠들어야 하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하루하루가 계속될 때, 우리를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책을 읽어가노라면, 남자에게 아들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살아갔을지 상상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가 필사적으로 식량을 구하고, 잘 곳을 마련하고, 지친 몸을 일으키게 만드는 힘은 아들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물리적인 면에서는, 연약한 아들이 늘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는 늘 아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토록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도 인간이 가진 순수함을 맑게 지니고 있는 아들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준다. 절박한 상황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선하고도 공정한, 자비로운 아들의 성품은 가끔씩 "신"의 존재를 상징히는 느낌도 준다. 선하고 자비로운, 다만 아무런 힘이 없는 신이 있다면 말이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두 부자의 모습은 영화 <정복자 펠레>의 펠레와 늙은 아버지를 떠올리게도 했다. (영화화되는 이 작품에서 아버지 역할은 비고 모텐슨이 맡았다고 한다.) 스토리의 전개 상 막스 폰 시도우처럼 너무 나이든 아버지는 맞지 않는 면이 있지만, 실제로 저자가 이 작품을 구상했을 때에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열 살이 채 안 된 아들과 여행하면서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하니, 인생에 대한 연륜이 쌓인 아버지도 나름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시종일관 암울하고 비참한 세계를 묘사하지만, 끝까지 죽음을 택하지 않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희망을 만나는 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나직한 격려를 보내는 듯 하다. 그리고 그 메세지가 주는 울림은 내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아들: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아버지: 중간 정도.

아들: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에요?

아버지: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