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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기묘한 텍스트에 담긴 어른들의 동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기묘한 텍스트에 담긴 어른들의 동화


Korea; 2006; 116min; 35mm; Color
Director: 신동일
Cast: 장현성, 박희순, 홍소희

2008년의 마지막 12월... 매년 그렇듯 많은 온오프라인 영화전문지, 영화 블로그 등에서 한 해 동안 개봉한 한국영화을 정리하는 기획들을 마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게 있다면 '올해의 한국영화'를 선정하는 일이다. 1등에서부터 줄을 세운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그 해' 의미가 있는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주목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것도 없을 것 같다. 순위를 매긴 곳의 성향이나 기호에 따라 순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2008년 눈에 띄는 한국영화가 예년에 비해 많이 않아서인지 선정된 영화 목록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추격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같이 이미 대박 흥행을 기록한 영화들도 있었고, 반대로 <밤과 낮>, <멋진 하루>, <미쓰 홍당무>, <중경>과  같이 극장 흥행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영화 텍스트 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품들도 있었다. 또한 <사과>처럼 뒤늦게 개봉해 인정을 받은 영화도 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영화가 있다. 바로 2005년 <방문자>로 충무로에 데뷔한 신동일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이다. 2008년이 끝날 무렵(11월 27일) 공개된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관객과 평단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이후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뒤늦게 개봉된 영화에 쏟아진 관심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그 관심을 그대로 반영하듯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해를 넘겨서도 여전히 스크린을 지키고 있고, 여러 매체에서 선정한 올해의 한국영화 수위에 이름을 올렸다.

과연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쏟아진 관심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를 본 후 이 영화의 힘은 '기묘함', '시의성', 그리고 '진실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보던 이야기 전개방식과 캐릭터 등에서 벗어난 '기묘함'이 매력적이었다면, 자본주의 내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과 386세대들에 대한 냉소적 은유 등 풍부한 메타포들을 담은 텍스트 역시 '시의성'과 '진실함'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지난 12월 30일 필름포럼에서 영화 상영과 함께 신동일 감독과 대화 시간이 마련됐다. 이 '기묘한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극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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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출발은 재문과 지숙 부부, 그리고 재문의 친구인 예준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가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혼한 재문과 지숙 부부... 요리사와 미용사로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 하나를 믿고 결혼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그들 옆에 재문의 오랜 친구 예준이 있다. 잘 나가는 외환딜러로 재문과 지숙 부부에게는 든든한 버팀목과 같은 친구이다. 결혼 준비부터 미국 이민 준비까지 부부를 도우며 예준은 가족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에게 헌신적인 겉보기와 달리 부부와 예준의 관계는 절대로 '수평적 관계'는 아니다. 재문과 지숙 부부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예준은 항상 그들 '위'에 있는 사람이다. 예준에게 부부는 지친 회사 생활의 피로를 풀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준은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경제적 도움을 주는 시혜자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때로는 성가시기도 하다. 반대로 재문은 예준에게 언제나 헌신적이다. 재문의 전화를 상황에 맏게 골라 받는 예준에 비해 재문은 심지어 부부관계 중에도 재문의 전화를 받고 달려나갈 정도로 맹목적이다. '너같은 친구를 둔게 자랑스럽다. 어려운 사회과학서를 읽고 있는 모습이 존경스럽다'는 말처럼 재문에게 있어 예준은 친구이면서도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의 사람인 것이다. 물론, 그들 사이에 큰 사건이 없다면 이런 식의 관계는 평이하게 별 문제 없이 계속됐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관계들처럼 말이다. 안정적인 불균형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사건은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었는지 단 번에 드러내는 단초가 된다.  

여기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키워드가 필요하다. 그것은 '자본'이다. 재문, 지숙 부부와 예준의 불평등한 관계는 애초에 '부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차이에 의한 서열'은 인간 관계에 그대로 투영되는 경향이 있다. 어렵지 않게 비슷한 예들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꿉놀이 친구도, 중고등학교 동창들도, 대학 동기들도 과거에는 모두 그냥 평등한 친구였지만 사회생활이 시작되면서 그 관계는 '소득 수준'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혹시나 금전 관계가 오갈 때면 그 불평등한 관계는 더욱 굳어지고, 이전의 순수한 관계는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 문제는 자본은 개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관계를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키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불평등한 관계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현재의 구조'이다. 이 구조를 가리고 개인이 느끼는 열패감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오로지 개인의 한계로 위장시키는 것이 바로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이다. 과연 자본이 지배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순수한 관계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예준과 재문, 지숙 부부의 관계가 그러하다. 재문과 예준이 만난 곳은 군대이다. 돈이 아닌 계급으로 서열이 나뉘는 그 곳에서 같은 나이의 예준과 재문은 서열을 뛰어 넘고 친구가 된다. 제대 후에도 이들의 관계는 돈독하게 유지되지만 '평등한 위치'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사회적 위치(자본)에 놓였을 때 이들의 관계는 예전 같을 수 없다. 도움을 주는 쪽과 도움을 받는 쪽으로 고정화되는 것... 그리고 다른 위치에서 재문, 지숙 그리고 예준이 그들의 관계를 대하는 태도와 입장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극의 후반부 예준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재문과 지숙 역시 그들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은 결국 우리 소시민들이 그렇듯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함이다. 그들은 결혼과 함께 그들은 태어날 아기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각각 요리사와 미용사라는 전문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다면 취업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예준에게 떠듬떠듬 영어도 배우고, 미국에 사는 친척에게 없는 살림에서도 뭉칫돈을 보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걸 바닥에서 새로 출발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건 예준 밖에 없다. 하지만 기대면 기댈수록 그들 사이의 평등한 관계는 요원해진다. 그리고 균형점을 잃어버린 관계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 재문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재문은 지금까지 자기 부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예준에게 그것만이 보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그게 우정인듯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 채,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지숙을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게 언제가 될지 자신도 모르지만... 예준 역시 죄책감에 감옥에 간 재문과 남아 있는 지숙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

2년 후 형기를 마친 재문은 감옥을 나오고, 지숙은 이름 있는 헤어 디자이너가 돼서 다시 돌아온다. 예준 역시 회사의 간부급으로 승진해 한강이 전면에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제 이들에게 편할 날만 남아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준은 자신의 허물을 덮어쓴 재문이 부담스럽다. 이제 온전히 자신이 재문의 위에 군림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평생 안고 가야 할 그 책임감 때문에 오히려 재문을 더 피하고 싶을 뿐이다. 그와 별개로 예준의 눈에 지숙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동네 미용사로 미래가 없어 보일 때는 그저 착한 친구의 아내일뿐이었던 지숙의 성공한 모습은 그로 하여금 엄청난 소유욕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재문과 있었던 엄청난 사건을 묻어둔 채 그녀에게 접근한다. 지숙과 예준의 관계가 진행될수록 예준이 느끼는 조급함은 더해 간다. 치킨집을 내고 자리를 잡은 재문이 지숙을 만나보고 싶어 하면서 예준의 긴장은 극에 달한다. 그리고 그 긴장이 결국 예준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이들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어찌보면 '비균형의 균형 혹은 비균형의 안정'을 잃어버린 순간부터 이 파국은 예상됐던 것일 수도 있다.

예준은 2년 동안 재문과 지숙을 뒷바라지 한 것으로 속죄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재문과 지숙이 똑같이 하는 말처럼 그들은 예준으로부터 단지 "적어도 미안하다는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예준의 태도는 냉소적이다. "이것들이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먹고 사는데!" 숟가락을 던지며 예준이 뱉은 말은 충동적이지만 재문과 지숙을 대하는 예준의 태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항상 부부를 도왔던 인자한 모습의 예준은 결국 그들보다 많이 갖고 많이 배운 자신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숙과의 관계가 평등해지고, 재문에게 씻을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서 예준은 공고했던 자신의 자리에 불안을 느낀다. 마치 계급이 역전되는 듯한, 즉 노동자에게 전복당하는 자본가의 모습처럼 말이다. 어찌보면 신동일 감독은 재문, 지숙, 예준을 통해 겉으로 평등해보이지만 그 속에서 철저하게 계급화 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계의 이중적인 모습을 냉철하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장현성이 연기하는 '예준' 캐릭터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숙과 재문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임에 틀림 없지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는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영화를 전개하는 주인공은 '예준'이다. 예준은 자본주의에 최적으로 적응한 인물이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금융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어차피 경쟁사회에서 팀워크가 없다고 투덜대는 주변 동료들은 그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예준의 과거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군대에서 만난 재문에게 인간은 원래 평등하다며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고,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철학에 심취한 좌파 운동권이었다. 그러던 그가 마르크스가 가장 증오했을 법한 돈이 돈을 버는 금융업에 종사하며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마르크스는 술자리 안주나 농담으로 입에 오를 뿐이다. (재문의 아이를 민혁이나 예니로 지어야 한다는 예준의 말에서 진지함은 묻어나지 않는다.) 마치 386 운동권 세대를 연상시키는 예준의 변화는 그래서 더욱 시의성을 갖는다. 피끓는 젊은 시절 줄기차게 사회변혁을 외쳤던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 '자본주의의 계급'에 철저하게 매몰되어 있는 모습을 '예준을 통해'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386 세대의 영화감독'이라고 말하는 감독에게 예준은 꼭 한 번 얘기해야 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마지막 예준은 결국 스스로 속죄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화마를 피해 빠져 나온 재문과 지숙은 서로의 어깨에 기댄다. 그러다 갑자기 지숙은 뭐에 놀란듯 재문의 어깨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길을 걷는다. 카메라는 그런 지숙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신동일 감독은 사실상 영화의 마지막은 '걸어가는 지숙의 뒷모습'이라는 말을 했다. 그 이후 한적한 마을에서 동네 미용실을 하며 예전처럼 살아가는 재문과 지숙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하고 싶었던 '에필로그'와 같은 이야기였다는 것. 그렇다면 에필로그를 통해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행복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재문과 지숙이 다시 찾은 일상은 다름 아닌 '행복'인 것이다. 먼 길을 돌아와 집 앞에 걸린 파랑새를 발견한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처럼 말이다.

상영 후 은하해방전선의 윤성호 감독 진행으로 신동일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다. 객석의 질문이 없어 두 분이 참 고생하셨을 듯...


리뷰의 처음에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기묘한 텍스트'라고 말한 것은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받은 느낌(전개방식과 캐릭터 등에서)과 사뭇 달랐던 이유도 있고, 더불어 이 영화 하나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세 남녀의 치정일수도 있고, 연약한 인간의 속성과 버거운 욕망을 그대로 풀어놓은 이야기일수도 있다. 실제로 지숙, 재문, 예준 세 캐릭터의 입체적인 변화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난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시의성'이 강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을 놓쳐서는 이 영화가 왜 이 시점에서 가치가 있는지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동일 감독은 2년 전이 아닌 지금 영화가 개봉한 게 더 적절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현재도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P.S. 1> 극중에서 예준이 운동을 하다 보고 있는 영화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2006년도 작품 <유하>다. 이 장면을 찍을 때 배우 장현성 씨는 예준이라면 당연히 CNN을 봐야 하지 않냐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고 한다. 감독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고른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지 예준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CNN이었다면 다소 예준이 전형적으로 읽힐 수도 있었을 텐데, 예준을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코드가 된 것 같다.

P.S.  2>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다. 근래 한국영화에서 이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들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박희순과 장현성은 지금까지 봤던 그들의 어느 작품보다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그리고 지숙이 운영하는 미용실의 깨진 유리창을 교체하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가 신동일 감독의 다음 작품 <반두비>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P.S. 3>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는 엔딩 크레딧에 음악을 들을 수 없다. 단지 지숙의 가위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묘한 느낌이 나는 엔딩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