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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사라져가는 추억들 - 철거되는 세운상가, 낙원상가와 아트시네마, 그리고 <비카인드 리와인드>

#1
세운상가가 사라진단다. 종묘 공원 앞에 있는 그 낡은 건물 말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봤다. 처음 세운상가를 간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케이블방송이 없던 시절이었다. 유선방송까지 보지 않던 우리 집은 안테나로 지상파 방송을 보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안테나를 사러갔다. “세운상가는 용산 전자상가보다 호객 행위가 심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 다음으로 세운상가를 간 건 고등학교 때였다. 방송반에서 필요한 장비를 사러갔다. “세운상가에 가면 야한 비디오도 판다던데.” 친구가 얘기했다. 세운상가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곳에 무관심해졌다. 그리고 세운상가는 점점 낡아져 갔다. 지금은 흉물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곳에서 가끔 지나간 서울의 흔적을 발견한다. 세운상가를 지나갈 때마다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묘한 기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곳에 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2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매년 주최하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최 발표 기자회견을 갔다. 시간을 잘못 알아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숨을 돌리고 내용들을 받아 적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올해 ‘공간의 발견, 행복의 시네마테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관객이 더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그리고 낙원 악기상가에 어울리게 낙원음악영화제를 개최한단다. 공간성을 극대화하겠다는 야심이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낙원상가도 곧 없어진다지만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상영관을 꾸며가겠다.” 물론 전용관 확보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을 예정이다. 그러니까 서울아트시네마도 몇 년 내에는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유일한 악기전문상가인 낙원상가도 사라질지 모른다. 대학교 시절 밴드를 할 때 낙원상가를 자주 다녀가곤 했다. 수원까지 드럼 세트를 들고 옮긴 끔찍한 기억도 있다. 극장은 또 어떠한가. 수많은 고전들을 만난 곳. 그리고 우디 앨런의 영화와 처음 조우한 곳. 한 동안은 계속되겠지만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른다니 한숨이 나온다. 추억의 장소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

#3
미셸 공드리의 <비카인드 리와인드>를 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터널 선샤인> 때문에 공드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이터널 선샤인>을 공드리의 영화가 아니라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공드리의 <휴먼 네이처>, 스파이크 존즈의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의 시나리오를 썼다)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드리가 직접 각본을 쓴 <수면의 과학>을 봤을 때 나는 난삽하고 빈약한 이야기를 기발한 상상력으로만 메우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해요, 공드리. 나는 당신보다 찰리 카우프만을 더 좋아해요. 그래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도 당연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예상을 뛰어넘는 영화였다. 공드리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빠져들어 버렸다. 허름한 비디오 가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물론 여전히 영화는 난삽하다. 비디오테이프의 내용들이 지워지기까지의 이야기들은 공드리만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설정이긴 하지만 웃음과 함께 허탈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됐든 간에 중요한 건 주인공들이 조악하게 만드는 비디오다. 공드리가 기발한 상상력으로 영화를 만들 듯, 영화 속 주인공들도 자신만의 발상으로 영화를 재구성한다. 처음엔 그냥 웃음거리를 위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오히려 조악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영화의 즐거움임을 드러낸다. 단순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즐기기만 하던 관객들은 이제 주인공들과 함께 영화 생산의 주체가 되어 촬영과정에 동참한다. 조잡한 촬영과 편집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순간,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잊고 있는 무언가를 상기시키며 뜻밖의 감동을 선사한다. 추억을 지킨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있는, 삶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작은 감동인 것이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비카인드 리와인드>처럼 추억이 남아있는 비디오가게가 남아있지 않다. 동네에서 비디오가게가 사라진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변해가고, 사라져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것들에 빨리 익숙해지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말 그대로 테크놀로지의 시대다. 뭐든지 부수고 새로 짓는다. 집에서 조금만 가면 있는 구파발은 꽃시장이 있고 서민적인 느낌이 묻어나던 따뜻한 동네에서 으리으리한 고층아파트들이 가득한 삭막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주택들도 하루 아침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파트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새로운 게 좋으니까. 인터넷은 100메가 광랜도 빠른데 몇 년 뒤에는 더 빠른 인터넷이 등장한단다. 핸드폰은 눈 깜짝하면 새로운 모델들이 등장한다. 모든 것들이 너무 빨리 변해간다. 덩달아 추억들도 사라진다. 돌아볼 여유가 없다. 이러다 추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도 추억의 장소라고 보여줄 곳이 없을 것 같다. 그런 우리들에게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묻는다. 당신의 추억도 사라져가고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