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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씨네큐브

<워낭 소리>와 <제주 걷기 여행>의 만남


지난 14일 저녁 씨네큐브 광화문에서는 영화 <워낭소리> 상영과 함께 이충렬 감독과 <제주 걷기 여행>의 저자 서명숙씨를 함께 만나보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씨네큐브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는 "책 읽어주는 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벌써 다섯번째의 크로스오버 이벤트가 진행되어 온 셈인데요, 이번 행사 역시 "걷기"와 "우리의 땅"이라는 진한 공통점을 가진 책과 영화라는 미디어의 꽤 어울리는 만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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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관객까지 합하면, 300석에 가까운 씨네큐브 1관이 90%에 가까운 좌석점유율을 보인, 뜨거운 호응 속에 치러진 이 행사는 먼저 영화를 상영한 후에, 감독과 저자, 그리고 관객들이 함께 하는 대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IMF 때 구상을 해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시는 이충렬 감독님은 본인 스스로가 전북 영암의 농촌 출신이며, 아버지와 소의 이미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둘 사이의 유전자가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하시더군요.) 그런 관계라고 하시더군요. 따라서 "할아버지와 소"라는 자연스러운 관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서명숙 저자는 영화에서 "할머니"에게 훨씬 감정이입을 하셨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에 대한 애환을 곁들여 주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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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질문 시간에는 멀리 청주에서 오신 분께서, 정작 이런 영화를 지방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씀하시자, 객석에 계셨던 고영재 PD가 직접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산업의 논리로 인해 일단 개봉관 수가 제한되어 있지만, 상영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우리 학교> 때처럼 극장이든 어디든 찾아가서 상영을 하겠다고 말씀하셔서 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잘 지내시는지, 젊은 소는 이제 길들여졌는지 등의 질문도 있었는데, 두 분 건강이 아주 좋으신 건 아니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계시고, 젊은 소는 이제 길들여졌으나 힘이 너무 넘쳐서 예전 소와 너무 다르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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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할머님이 이 영화를 보셨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들 하셨는데, 사실 할아버지는 영화와 TV와 사진의 차이도 잘 알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저 카메라만 들이대면 활짝 웃으신다고요. 영화를 보시고도 남의 일인 듯 무심하게 받아들이셨다고 하고, 다만 할머니께서는 자신이 신세한탄을 하던 나훈아 노래 장면에서 눈물을 보이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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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눈에 띄는 분이셨던 강기갑 의원님에게도 마이크가 건네졌었는데요, 소를 위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게 하고, 사료 대신 쇠죽을 먹이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생명을 소중히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곤충과 동물과 인간을 모두 살리는 농법을 쓰게 된다는, 이런 "상생"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해주는 훌륭한 영화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땅의 의미와 농민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농민들은 우리의 밥상을 마련해 주는 어머니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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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라는 책을 쓰시고, 100km 가 넘는 제주 올레 길을 만드는 데 앞장서신 서명숙씨는, 정치부 여기자 1세대이면서 시사주간지 사상 최초의 여성편집장을 역임하셨던 분으로, 23년에 걸친 기자생활을 때려치우고 홀연히 떠났던 '걷기 여행'으로 인생을 바꾸신 분입니다. 느리게 걷기, 느리게 살기를 몸소 실천하고 계신 이 분은 제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계시며, 간세다리(게으름뱅이)처럼 걷는 것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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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PIFF 메세나상 수상, 그리고 제25회 선댄스영화제 월드다큐멘터리 경쟁 진출로 작품성까지 인정받고 있는 <워낭소리>는 실용과 속도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삶을 보여주는 할아버지와 소가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경북 봉화 하눌마을에 사는, 소를 몰아 밭을 갈고 꼴을 베서 소를 먹이며 소가 힘들면 자신이 손수 논을 다듬고 모를 내는 천연기념물 같은 농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속에 녹아들어간 아름다운 자연 풍경, 자연의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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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가 지루할 거라는 편견을 깨고 웃음을 안겨주곤 하는 할머니의 넋두리, 할아버지와 소와 할머니가 엮어내는 삼각관계같은 멜로 드라마, 젊은 소와 늙은 소 간의 갈등 등등 이 작은 영화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우리는 할아버지와 소의 삶 자체에서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현실 그 자체가 어떤 영화적 수사보다도 진실되고 심오한 것, 그것이 바로 다큐의 참 의미이자 논픽션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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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소가 40살인데, 원래 소의 수명은 15년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연적인 수명보다 몇 배를 더 살은 소에 대한 놀라움도 있었지만, 소의 수명이 15년이라는 사실이 제게는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해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을 걱정하면서 왈가왈부했던 소고기의 개월수는 30개월 미만이었습니다. 15년 동안 살아가는 동물을 성장 촉진제를 먹여 키워서 3살도 되기 전에 죽여서 고기로 만드는 인간의 잔혹함은 언제나 대형 마트 진열대의 깔끔함 뒤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0년을 살았다는 영화속의 소는 몸은 늙고 지쳐보이지만 평온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노동에 지친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소에게 사료보다 꼴을 베어 먹이고, 기계가 아닌 낫으로 벼를 베고,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배려와 함께 소는 외롭지 않은 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남들이 편하게 기계로 농사로 짓고 농약을 칠 때에 소와 함께 평생 한 길을 걸어온 할아버지의 삶은, 편리를 위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절대 바꾸지 않는, 깊은 철학이자 신념, 그 자체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되도 절대 타협하지 않고, 정든 소를 절대 헐값에 넘기지 않으며, 자연을 해치는 일이나 생명을 해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숭고한 고집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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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지난지 벌써 10년, 요즘이 그때보다도 더 어려운 시기가 될지 모른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소의 해, 기축년에 극장에 걸린 이 영화 속에서 들려주는 "워낭소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지를 잔잔하게 들려주는 듯 합니다.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 함께 산다는 것, 말없이 행동으로 서로를 위한다는 것, 짐을 나누어 진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삶의 여유를 그립게 하고, 자연과 생명을 돌아보게 하는 올해의 가장 따뜻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