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체인질링'은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자신의 아이가 뒤바뀌어 버린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그린 영화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아이를 트롤 같은 요정이 못생긴 아이로 뒤바꾼다는 유럽의 설화인 '체인질링'처럼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틴 콜린스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LA 경찰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아이가 바뀌게 되는 어이없는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아이를 잃어버린 여성의 비극적인 일생을 그리면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헤프닝을 통해 무책임한 공권력이 인간의 삶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크리스틴 콜린스는 자신의 아들인 월터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다. '책임'이라는 상자를 두고 도망가버린 남자 없이 홀로 살아가는 크리스틴에게 아들의 존재는 그녀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월터와 채플린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 인력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은 크리스틴은 어쩔 수 없이 월터를 아는 사람에게 부탁한 체 길을 나선다. 일을 끝낸 후 아들을 만나기 위해 초조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아이가 집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크리스틴은 애타게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전화의 목소리는 그저 사라져버린 아이의 잘못만 언급할 뿐 24시간이 지나야 실종 접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책임한 경찰의 목소리를 들은 크리스틴은 항의조차 하지 못한 체 그저 기다릴 뿐이다. 하루 이틀 지나던 월터의 실종은 이제 몇 개월이 지나도록 행방이 묘연해진다. 이 때 영화는 장로교 목사인 구스타브 브리그랩이란 남자를 등장시킨다. 구스타브의 설교를 통해 영화는 당시의 LA 경찰의 부패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기관총 특공대'라는 조직을 통해 경찰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암흑가와 거래하던 당시의 경찰들을 비난하는 그의 목소리는 훗날 있을 여인의 비극이 바로 경찰의 공권력에서 비롯됨을 암시한다.
수 개월동안 숨죽인 체 아이의 귀환을 기다리던 크리스틴은 어느 날 자신의 직장에 찾아온 존스라는 형사를 통해 자신의 아이인 월터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기차역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아이를 향해 달려가지만 아이를 본 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 체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월터란 아이는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아이였던 것이다. 크리스틴은 아이를 본 후 형사에게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경찰의 위신을 세우기 바쁜 형사는 그녀에게 오랫만에 해후한 나머지 기억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한다. 얼떨결에 처음 보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해버린 크리스틴은 점점 정신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자신이 월터라고 주장하는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아이가 월터가 아님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들을 찾아내지만 존스는 그녀의 이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는 커녕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크리스틴이 원했던 것은 단지 월터의 수사를 계속해달라는 것 뿐이었지만 존스는 아이를 되찾은 그녀가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한다고 일축한 체 그녀를 믿지 않는다. 급기야 구스타브 목사의 제안으로 크리스틴이 소송을 제기하려 하자 존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경찰서로 소환한다. 존스는 이제 크리스틴을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헤픈 여자라고 모욕한다. 존스는 크리스틴의 이의 제기를 공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원에 수감시켜 버린다.
ps2.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분노해본 적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다. 실화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의 LA 경찰의 모습이 왜 이렇게 현대의 대한민국과 오버랩되던지... 영화는 정말 좋았다. 이렇게 눈물나도록 슬프다가도 정신이 바짝 들 만큼 공포스럽고 긴박감 있게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고 작품이라 말할 순 없지만 1월에 본 영화 중 최고라고 감히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크리스틴 콜린스는 자신의 아들인 월터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다. '책임'이라는 상자를 두고 도망가버린 남자 없이 홀로 살아가는 크리스틴에게 아들의 존재는 그녀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월터와 채플린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 인력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은 크리스틴은 어쩔 수 없이 월터를 아는 사람에게 부탁한 체 길을 나선다. 일을 끝낸 후 아들을 만나기 위해 초조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아이가 집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크리스틴은 애타게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전화의 목소리는 그저 사라져버린 아이의 잘못만 언급할 뿐 24시간이 지나야 실종 접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책임한 경찰의 목소리를 들은 크리스틴은 항의조차 하지 못한 체 그저 기다릴 뿐이다. 하루 이틀 지나던 월터의 실종은 이제 몇 개월이 지나도록 행방이 묘연해진다. 이 때 영화는 장로교 목사인 구스타브 브리그랩이란 남자를 등장시킨다. 구스타브의 설교를 통해 영화는 당시의 LA 경찰의 부패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기관총 특공대'라는 조직을 통해 경찰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암흑가와 거래하던 당시의 경찰들을 비난하는 그의 목소리는 훗날 있을 여인의 비극이 바로 경찰의 공권력에서 비롯됨을 암시한다.
수 개월동안 숨죽인 체 아이의 귀환을 기다리던 크리스틴은 어느 날 자신의 직장에 찾아온 존스라는 형사를 통해 자신의 아이인 월터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기차역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아이를 향해 달려가지만 아이를 본 순간 아무말도 하지 못한 체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월터란 아이는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아이였던 것이다. 크리스틴은 아이를 본 후 형사에게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경찰의 위신을 세우기 바쁜 형사는 그녀에게 오랫만에 해후한 나머지 기억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한다. 얼떨결에 처음 보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해버린 크리스틴은 점점 정신적인 혼란을 겪게 된다. 자신이 월터라고 주장하는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아이가 월터가 아님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들을 찾아내지만 존스는 그녀의 이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는 커녕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크리스틴이 원했던 것은 단지 월터의 수사를 계속해달라는 것 뿐이었지만 존스는 아이를 되찾은 그녀가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한다고 일축한 체 그녀를 믿지 않는다. 급기야 구스타브 목사의 제안으로 크리스틴이 소송을 제기하려 하자 존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경찰서로 소환한다. 존스는 이제 크리스틴을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헤픈 여자라고 모욕한다. 존스는 크리스틴의 이의 제기를 공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그녀를 정신병원에 수감시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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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정신병원에 수감된 크리스틴은 정상인인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병원의 관계자들에게 갖은 모욕과 고난을 겪는다. 헤픈 여자 취급하듯이 매독검사를 하고 약을 먹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환자를 힘으로 제압하며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일삼는 정신병원의 풍경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정신병원에서 기약없이 하루를 보내던 크리스틴은 케롤 덱스터란 여인을 통해 정신병원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들은 단지 소송을 통해 경찰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자들로 몰려 갇히게 된 것이다. 공권력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여성들을 정신병자로 취급했다는 사실은 경찰의 무자비한 공권력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또한 정신병자로 몰리게 된 사람들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주로 남성들이 지배한 경찰의 횡포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여성들이 정신병자로 희생되었다는 점은 당시의 억압적인 여성차별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크리스틴과 케롤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 간의 연대와 적극적인 저항을 통해 남성적인 경찰의 공권력에 대항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찰의 무책임한 공권력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병원 관계자들을 향해 욕설을 날리며 저항한다. 전기고문을 각오하고 저항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그녀가 소극적이고 힘없는 여성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여성으로 변화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공권력으로 희생된 여인의 삶을 그릴 것 같았던 영화는 생각치 못한 변수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전개한다. 불법 체류 문제로 붙잡힌 샌포드 클락이란 소년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스릴러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샌포드가 이바라 형사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면서 영화는 충격적인 연쇄살인범인 고든 노스콧을 드러낸다. 아이들을 납치해 닭장에 가둔 다음 마치 동물을 토막내듯이 도끼로 아이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고든 노스콧이란 남자의 범행의 전말과 그가 저지른 범행 현장이 등장하는 모습은 끔찍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샌포드가 희생된 아이들의 사진을 지적하면서 월터가 고든 노스콧이란 연쇄 살인범에게 희생된 사실이 드러나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체 진실을 회피한다. 결국 그들은 크리스틴과 구스타프의 소송이 제기되자 뒤늦게서야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하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실수를 책임지고 과오를 반성하지 않은 체 끝까지 변명하는데 급급한다. 존스 형사를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찰청장의 모습과 월터 행새를 한 아더라는 소년이 진실을 말하자 그의 입을 막은 체 다른 부모에게 떠넘겨버리는 모습은 경찰의 무책임한 행동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수감토록 한 존스 형사와 경찰청장 등이 처벌받고 연쇄 살인범이 사형 판결을 받는 과정을 교차시키면서 정의가 준수되고 공권력에 희생된 여인의 명예가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판결의 승리에서 끝나지 않은 체 살인범의 최후를 보여주면서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겠다는 고든의 전보를 받은 크리스틴은 그가 수감된 감옥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크리스틴을 대면한 고든은 그녀를 본 순간 자신은 죄를 회개받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소리치면서 월터의 죽음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피해자인 크리스틴은 격앙된 목소리로 고든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네가 내 아이를 죽였냐고 되묻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고든 노스콧은 사형대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뒤늦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나를 밀지 말라고 애타게 소리치던 고든은 찬송가를 부르며 불안감을 해소하려 하지만 끝내 법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한 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고든의 비참한 죽음의 과정은 사형제도의 비정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지만 피해자에게 솔직한 고백을 하지 못한 체 신의 이름을 빌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의 모습은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 비록 고든 노스콧의 살해 협박 때문에 공범자가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형사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샌포드의 모습과 죽음 직전까지 신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진실을 회피한 고든의 대조적인 모습은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연쇄 살인범인 고든 노스콧의 처형으로 월터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크리스틴은 끝내 월터의 죽음을 믿지 못한다. 경찰의 무책임한 수사 과정과 부당한 공권력으로 삶의 일부분을 상실했던 크리스틴으로서는 아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직장인 통신회사에 복귀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실종 아동 센터에 전화를 걸어 아이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느날 밤에 생긴 일'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던 35년의 어느 날 크리스틴은 고든 노스콧으로부터 희생된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뒤늦게 살아 돌아온 아이는 자신이 월터의 도움을 통해 기적적으로 생존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비록 월터의 생사 여부는 끝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수년 후에 나타난 생존자를 통해 월터의 소식을 접한 크리스틴은 눈물을 흘린다. 창문 너머의 존재를 통해 마치 자신의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틴은 이바라 형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희망'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크리스틴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영영 잊지 못한 체 살아갈테지만 아이가 생존했을 거라는 희망은 그녀의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크리스틴의 마지막 모습은 슬픔이 아닌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공권력으로 희생된 여인의 삶을 그릴 것 같았던 영화는 생각치 못한 변수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전개한다. 불법 체류 문제로 붙잡힌 샌포드 클락이란 소년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스릴러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샌포드가 이바라 형사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면서 영화는 충격적인 연쇄살인범인 고든 노스콧을 드러낸다. 아이들을 납치해 닭장에 가둔 다음 마치 동물을 토막내듯이 도끼로 아이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고든 노스콧이란 남자의 범행의 전말과 그가 저지른 범행 현장이 등장하는 모습은 끔찍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샌포드가 희생된 아이들의 사진을 지적하면서 월터가 고든 노스콧이란 연쇄 살인범에게 희생된 사실이 드러나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체 진실을 회피한다. 결국 그들은 크리스틴과 구스타프의 소송이 제기되자 뒤늦게서야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하지만 경찰은 자신들의 실수를 책임지고 과오를 반성하지 않은 체 끝까지 변명하는데 급급한다. 존스 형사를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찰청장의 모습과 월터 행새를 한 아더라는 소년이 진실을 말하자 그의 입을 막은 체 다른 부모에게 떠넘겨버리는 모습은 경찰의 무책임한 행동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수감토록 한 존스 형사와 경찰청장 등이 처벌받고 연쇄 살인범이 사형 판결을 받는 과정을 교차시키면서 정의가 준수되고 공권력에 희생된 여인의 명예가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판결의 승리에서 끝나지 않은 체 살인범의 최후를 보여주면서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겠다는 고든의 전보를 받은 크리스틴은 그가 수감된 감옥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크리스틴을 대면한 고든은 그녀를 본 순간 자신은 죄를 회개받아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소리치면서 월터의 죽음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피해자인 크리스틴은 격앙된 목소리로 고든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네가 내 아이를 죽였냐고 되묻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고든 노스콧은 사형대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뒤늦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나를 밀지 말라고 애타게 소리치던 고든은 찬송가를 부르며 불안감을 해소하려 하지만 끝내 법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한 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고든의 비참한 죽음의 과정은 사형제도의 비정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하지만 피해자에게 솔직한 고백을 하지 못한 체 신의 이름을 빌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의 모습은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 비록 고든 노스콧의 살해 협박 때문에 공범자가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형사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샌포드의 모습과 죽음 직전까지 신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진실을 회피한 고든의 대조적인 모습은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연쇄 살인범인 고든 노스콧의 처형으로 월터의 죽음은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크리스틴은 끝내 월터의 죽음을 믿지 못한다. 경찰의 무책임한 수사 과정과 부당한 공권력으로 삶의 일부분을 상실했던 크리스틴으로서는 아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직장인 통신회사에 복귀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실종 아동 센터에 전화를 걸어 아이를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느날 밤에 생긴 일'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던 35년의 어느 날 크리스틴은 고든 노스콧으로부터 희생된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뒤늦게 살아 돌아온 아이는 자신이 월터의 도움을 통해 기적적으로 생존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비록 월터의 생사 여부는 끝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수년 후에 나타난 생존자를 통해 월터의 소식을 접한 크리스틴은 눈물을 흘린다. 창문 너머의 존재를 통해 마치 자신의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틴은 이바라 형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희망'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크리스틴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영영 잊지 못한 체 살아갈테지만 아이가 생존했을 거라는 희망은 그녀의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크리스틴의 마지막 모습은 슬픔이 아닌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ps.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담당한 음악이 인상적인데, 쓸쓸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재즈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더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Clint Eastwood - Changeling End Theme
ps2.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분노해본 적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다. 실화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의 LA 경찰의 모습이 왜 이렇게 현대의 대한민국과 오버랩되던지... 영화는 정말 좋았다. 이렇게 눈물나도록 슬프다가도 정신이 바짝 들 만큼 공포스럽고 긴박감 있게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고 작품이라 말할 순 없지만 1월에 본 영화 중 최고라고 감히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