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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24시티> 기록자으로서의 카메라


China; 2009; 112min; Docu&Drama; Color
Director: Jia Zhang ke
Cast: Joan Chen, Zhao Tao, Jianbin Chen

'중국'은 괴물이다. 잠시 멋친 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황하에 물이 흐르고, 인간이 모여 살 때부터 중국은 주변을 압도하는 괴물이었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국의 역사이자, 정복의 역사였다. 그들의 무력은 주변국을 오랑캐 내지 제후국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문화와 학문은 '동아시아적 사고'의 거대한 뿌리를 이뤘다. 세계 어떤 제국도 과거 중국의 역사 만큼 무력을 넘어선 사상적, 문화적 제국이 되지는 못했다. 한족의 무대였던 이 거대한 땅을 무력으로 정복했던 몇몇 민족들도 그 거대하고 고고한 문화 앞에 결국 칼을 내려놨다. 세상의 중심, 곧 중화(中華)는 수 천 년에 걸친 중국 역사가 만들어 놓은 결정체였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이 콧대 높은 중국의 본격적인 비극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했다. 유럽의 서구 열강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를 안겼다. 원료생산지, 시장이 되어 버린 황제의 땅은 생면부지의 차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비참하게 희생되고 죽어갔다. 이 핍박과 수탈의 역사에서 사들어 간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크나큰 상처를 안긴 '자본주의'를 뛰어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사람들은 붉은기 아래 모여들었고, 마오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불완전한 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마오가 중국인들의 자존감을 부활시킬 수 있었지만, 그들을 가난에서 구제하지는 못했다. 중국은 부활했지만 근대 이후 역사에서 수 천 년간 그들을 빛나게 했던 화려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울한 근대사를 극복하고 중국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 중심은 단연 '경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샤오핑의 이른바 흑묘백묘론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세계 인구의 1/5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더 이상 몸짓만 큰 나라가 아니다. GDP만으로 미국과 일본 다음이고, 연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중이다.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이는 투자의 중심이 됐고, 모든 글로벌 기업이 꿈꾸는 시장이 됐다. 중국에 가뭄이 들면 밀과 옥수수와 같은 주요 곡물의 가격이 오르고, 중국의 자동차와 공장이 많이 돌아가면 국제유가가 오른다. 일본을 제치고 최대 미국 국채 투자국이 됐고,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하며 미국 경제마저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경제대국이 됐다. 미개하다고, 가난하다고 무시했던 유럽의 콧대 높은 강대국들조차 티벳 분리 운동 과정에서 보여주듯 쓴소리 제대로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국은 보란듯이 올림픽도 치뤘다. 정치, 군사대국을 넘어 부자나라가 된 중국은 그렇게 새로운 국가발전의 성공 모델이 되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굴기'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괴물'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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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변화했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시장자본주의를 끌어 안는데 성공한 유일무이한 국가, 중국... 그들의 변화에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이 시스템의 변화는 비단 제도나 정책 등의 외형만 바꿔 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의 땅의 생김새를 바꿔놓았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 태도마저 변화시켰다. 동부 해안에서부터 시작된 서구식 도시의 성장은 점점 서쪽으로 확대되며 대지를 변화시켰고, 사람들은 역시 돈을 최대의 가치로 신봉하며 농촌을 떠나 더 낳은 벌이를 위해 도시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땅'과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변화된 역사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넓은 중국의 대륙과 그 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중국이 가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피사체'가 된다. 우리는 중국의 화려한 과거도, 슬픈 상처도, 그리고 기적같은 부활도 그 땅과 사람들을 통해 변화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과연 중국은 지금 어디 있으며, 사람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과거의 대국의 지휘를 회복하고 있는 현재 중국의 모든 장면, 순간들이 휘황찬랑하게 빛이 나고 있을까? 지금은 그 땅과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중국의 땅과 사람들의 표정에 있을 것이다.

지아장커의 새 장편영화 <24시티>가 개봉했다. 1997년 <소무>를 통해 장편영화에 대뷔한 지아장커는 <플랫폼>, <임소요>, <세계>, <스틸 라이프>, <동>, <무용> 등의 장편과 몇몇 단편을 통해 동시대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됐다. 그의 카메라는 항상 현재 중국의 어느 공간과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그는 공간을 통해 지금의 중국을 이야기하고, 중국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과 그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 이는 <세계>와 <스틸 라이프>를 지나면서 더 분명해진다. 세계의 유명 관광지를 그대로 복원한 거대 놀이공원 세계공원을 무대로 한 <세계>, 그리고 세계 최대의 댐이 될 샨샤댐을 담은 <스틸 라이프>와 <동>은 지금의 변화된, 변화하는 중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다. 변화된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땅의 모양을 바꿔 놓은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진 사고와 태도의 변화 역시 이끌었다. 그 공간들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자본주의적인 공간이었으며, 발전의 결과였다. 자본의 총체였고,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할 수 있는,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변화된 공간에 창조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역시 스스로를 위해 최대한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다.


<24시티>가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쓰촨성 도시 청두의 420 공장 역시 지아장커의 이전 영화들의 공간들이 상징하는 바와 닮아 있다. 1958년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경제개발 당시 만약에 있을 적의 공격에 대비해 내륙 깊숙이 세워진 이 군수공장은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자들까지 흡수하면서 청두 안에 하나의 작은 도시가 됐다. 하지만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중국이 시장경제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420 군수공장의 역할도 점점 자리를 잃어갔다. 결국 420공장을 운영하던 청파그룹은 대지를 넘기고, 5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던 공장은 '24시티'라는 이름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뀔 예정이다. 중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물이 가장 현대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이 자오 타오의 말처럼 24시티의 최신식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집... 그 집들이 50년 동안 수 많은 노동자들의 생계를 책임진 곳을 대체하려 한다. 이제 그 곳은 더 이상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의 공간이 된다. 이 때문에 24시티는 중국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지아장커는 420 공장의 마지막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는 마지막 업무를 마친 노동자들이 탄 자전거거 회사 정문을 빠져 나오는 모습을 비춘다. 곧 50년을 지키고 있었던 공장의 팻말도 교체된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기계와 사람들로 쉴 틈이 없었던 공장은 비워지고, 육중한 장비들이 차례차례 건물들을 부순다. 그리고 한 편에서 없어지는 공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사라지는 공장과 함께 자신의 과거 역시 묻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420 공장과 함께 이 사람들의 얼굴과 말에도 눈과 귀를 기울인다. 공장이 처음 생긴 순간부터 함께한 사람도 있고, 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을 시작한 사람, 타지에서 일자리를 위해 청두로 이주한 사람, 공장이 싫어 떠난 사람 등 그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420 공장을 통해 영광을 말하고, 어떤 이는 아픔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공장이 세워진 1958년부터 현재까지 공장의 한 순간을 기억한다. 여덟 명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이면서 곧 420 공장에 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중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곧 변화하는 중국의 한 순간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인 것이다.


지아장커는 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까? 답은 사람들의 '말'과 '표정' 그 자체에 있다. 영화 <24시티>에서 사라지는 공단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알듯 모를듯 애매하다. 개발이 가져올 화려한 미래에 들떠 있지도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생계를 끊어버리는 철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격렬한 환희도, 매서운 비판도 없다. 카메라는 그의 영화들이 그렇듯 한폭의 풍경화나 정물화를 연상시키듯 큰 움직임 없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이 거대한 소멸과 탄생이 역사의 순리인 것처럼 변화의 현장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50년 전 아무것도 없던 곳에 공장이 들어섰고, 시간이 흘러 다른 구조물이 공간을 대체하는 순간... 이제는 사라져 없어질 것을 기록하려는듯 카메라는 공장의 구석구석을 바라볼 뿐이다. 감독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420 공장의 소멸은 단지 5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50년은 중국이 온전한 국가가 된 이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태, 개혁개방 등 파란만장한 중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420 공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감독은 이 공간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아장커에게 곧 없어질 구조물만 기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영혼이 부재한 허울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마치 건물에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덟 명의 화자들은 '3세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이주로 인해 '이별'의 상처를 공유한 이들이 1세대에 해당한다. 420 공장에 청춘을 바친 노인은 공장을 목숨보다 소중히 아낀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다른 노파는 이주정책에 따라 셴양에서 배를 타고 청두로 오던 중 잃어버린 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 이주한 중년 여성은 실직 후 생계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족을 떠나고 싶어 청두로 온 여성은 여자로서 자신의 외로운 삶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변화를 묵묵히 따랐고, 그들이 겪어야 할 상처들을 자신의 몫으로 돌렸다. 그들이 모두 흘린 '눈물'은 인내한 상처들에 대한 반증이다. 그리고 2세대가 있다. 이들은 420 공장에서 태어나고, 공장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공장과 함께 성장하고 중년이 된 2세대는 1세대 만큼의 극적인 인생이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진로는 이미 결정이 돼 있었고, 큰 변화 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3세대가 있다. 공장에서 태어나 성장한 점이 전 세대와 같다면 다른 점은 그들은 변화된 세상의 흐름에 맞춰 전세대가 살았던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세대와 다른 가치과 사고를 가진 세대이다. 공장의 노동자가 되길 거부하고 아나운서로 변신한 남자와 폴크스바겐을 모는 멋진 사업가로 변한 여성이 그들이다. 두 인물은 모두 공통적으로 '24시티'를 꿈꾼다. 420 공장을 벗어난 그들에게 있어 성공은 당이나 군의 고위직이 아닌 모두가 부러워 할 '부(자본)'를 갖는 것이다. 그 현실적인 목표가 바로 24시티이다.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50년 중국의 변화는 이렇게 420 공장에서 살았던 3세대에게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24시티>에서 흥미로운 점은 8명의 인터뷰이가 모두 실제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4명은 실제 인물이고, 4명은 배우들이 연기한 가짜이다. 그래서 영화는 온전히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지아장커가 장르의 경계를 붕괴한 것은 이번 만은 아니다. <세계>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삽입됐고, <스틸 라이프>에서는 다큐멘터리였던 <동>의 영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24시티>는 부분적으로 이뤄지던 경계허물기를 영화 전체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감독이 인터뷰 한 130명 중에서 촬영을 거부한 경우도 있지만,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에게 연기를 맡긴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조안 첸, 자오 타오, 루 리핑, 지안빈 첸 등) 여기에 대한 답은 감독의 말에 있는 듯하다. "내게 역사란 사실과 상상의 혼합체이기에, 지난 반세기 동안의 중국 역사를 재연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평행한 흐름 속에서 통합했다." 분명 역사는 사실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개인의 상상이 덧대지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24시티>는 분명 개개인의 '기억에 근거한 기록'인 것이다.




P.S. first
지아장커는 이미 거장이다. 난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과연 불혹도 되지 않은 감독이 만든 것인가.' 하는 놀라움을 경험한다. 그의 영화적 언어, 영상미학은 둘째 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가진 깊이가 놀랍다. 그리고 거기서 묻어나는 인간적 성숙도가 부럽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의 카메라가 고마울 따름이다.

P.S. second
지아장커는 가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넌지시 희망을 얘기한다. <세계>에서 "이제부터 시작이야." 라고 읊조리는 자오 타오의 마지막 대사에서 느껴지듯 <24시티> 역시 그 희망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지아장커의 페르소나가 되어 버린 자오 타오는 '수나'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녀는 공장이 싫어 뛰쳐나왔고, 자연스레 부모와도 멀어진 인물이다. 곧 그녀는 '중국의 근대'를 부정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집에 들렸다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됐음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부모의 인생을 그들의 입장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중국의 근대와 현대 그리고 420 공장의 3세대가 갈등이 아닌 공존이 가능함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4시티>가 따뜻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P.S third
용산 철거 현장에서 벌이진 일로 많은 문제들이 한국 사회에 던져졌다. 원래 있는 문제들이 곪아터져 비극적 사건으로 나타났지만 아직도 문제가 뭔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24시티>를 보면서 문득문득 용산현장이 생각이 났다. 왜 우리는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근거 없는 장밋빛 청사진에 가려 그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을가? 용산에서는 눈부신 미래를 위해 '지금'은 부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더 비극은 그 곳에 있던 사람들까지 덩달아 부정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여기서 시작됐다. 왜 그들의 인생을 존중하지 못하고 부정해야 했을까? 그것이 비단 용산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개발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