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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낮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웃겨드립니다!


낮술 (Daytime Drinking)
노영석 감독, 2008년

상업영화도 울고 갈 초저예산영화의 매력

1천만 원의 제작비, 13일의 촬영기간, 총 10회 동안의 촬영. 단편영화 한 편 찍어본 적 없는 신인감독과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 그리고 열악한 조건에도 영화만을 위해 모인 스탭들이 한데 뭉쳐 만든 <낮술>은 초저예산이라는 한계를 오로지 영화만을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극복해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스탭들의 뜨거운 소망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 <낮술>은 재미있다. 끝없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만으로 만들어내는 웃음의 매력이 쏠쏠하다. 영화는 우연히 여행을 떠난 한 남자의 끝도 없이 꼬여가는, 제목 그대로 ‘낮술’과도 같은 여행기를 코믹하게 그려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회사 일이나 도우며 백수로 지내고 있는 혁진(송삼동)은 여자친구와의 실연으로 힘들어하던 중,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강원도 정선에 가서 기분전환이라도 하라는 말에 무턱대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동행하기로 했던 친구들은 술 때문에 여행에 동참하지 못하고 혁진은 홀로 정선을 헤매게 된다. 낯선 곳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 누구나 꿈꾸게 되는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는 그러나 곧 악몽 같은 5박 6일로 돌변한다. 점점 꼬여만 가는 혁진의 여행. <낮술>은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혁진의 여행기를 통해 시종일관 웃음을 선사한다.


<낮술>의 웃음은 예상되는 상황들을 매번 배신하는 의외성에서 생겨난다. 여행의 설렘과 흥분, 그리고 해방감은 <낮술>에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 여행을 가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꿀법한 공상, 가령 버스든 기차든 옆에 근사한 이성이 앉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낮술>은 처참하게 무너뜨린다. 그 의외성의 이면을 파고들면, 술과 여자로 대변되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한다. 혁진이 여행을 하게 된 것도, 여행이 꼬여가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술과 여자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만난 미모의 여인이 같이 술을 마시자는데 마다할 남자가 있을까. 물론 혁진에게 이 악몽 같은 여행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전혀 찾아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인 혁진은 그런 기회가 올 때마다 번번이 호의를 거절한다. 하필이면 버스 옆에 앉은 여자가 안 예쁜 여자고, 차를 태워주는 남자가 게이이기 때문이다.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여자만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욕망을 거부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낮술>은 남성의 욕망을 가볍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살짝 비튼다. 남자라도 혁진의 모습에서 연민보다는 웃음을 먼저 찾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어떤 이는 <낮술>을 보며 <강원도의 힘>과 <봄날은 간다>를 떠올릴지 모른다. 세 편의 영화 모두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다. 남녀 간의 관계와 그 속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강원도의 힘>과 닮아 있고,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은 <봄날은 간다>와 맞닿아있다. 또한 영화 속 정선 버스 터미널의 에피소드는 직접적으로 <봄날은 간다>를 언급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노영석 감독은 홍상수 감독처럼 남녀 간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고, 허진호 감독처럼 사랑의 쓰라린 아픔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또 어떤 이는 혁진의 모습에서 88만원 세대의 단면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대학은 졸업했지만 아직 취업은 하지 못한 백수 혁진이 아무런 목적 없이 떠난 여행길에서 스스로의 판단보다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모습은 우울한 현실 속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현시대의 20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정작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고발하거나 위로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랬다면 혁진을 그저 웃음거리로만 삼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낮술>은 영화의 여러 부분들이 삶과 현실에 맞닿아있기에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노영석 감독 스스로 말하듯 <낮술>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재밌기 위해 만들어진, 전혀 심각하지 않은 영화다.


인상적인 것은 <낮술>의 웃음과 재미에는 그 어떤 불순한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업영화의 틀 속에서 만들어지는 여타 코미디영화들이 강박적인 웃음과 재미만을 만드는데 급급한 것과 달리, <낮술>은 말 그대로 순수하게 영화적인 재미를 추구한다. 매끈한 이야기와 적절하게 배치돼 웃음을 터트리는 대사들까지,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영화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데 충실하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때깔 좋게 만든 상업영화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실수들마저도 영화를 향한 열정처럼 느껴지는 <낮술>. 어쩌면 지금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영화계에 필요한 것은 <낮술>처럼 열정만으로 빛을 발하는 영화, 그리고 노영석 감독처럼 뚝심만으로 영화를 만들어내겠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