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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미키 루크, 더 레슬러 Mickey Rourke the wreslter

흔히들 <더 레슬러>가 배우 미키 루크의 재기작이라고들 말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더 레슬러>는 그의 내면에 감춰진 부드러움과 외로움과 결핍을 섬세하게 내보이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에, 그가 전력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몸을 던져가면서 연기한,
인간 미키 루크 자신의 재기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는 장면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이나 딸 앞에서
고통스러울 만큼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는 장면에서,
영화 안에서 그 자신만의 레슬링을 해 나간다.
당신은, 일생에 단 한번 만날 수 있는 역할을 맡아 목숨을 걸고 연기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될 것이다.

- "시카고 선 타임즈"의 로저 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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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에 미키 루크가 주연한 영화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개봉을 했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나인 하프 위크>나 <와일드 오키드>처럼 성적 매력을 풍기는 영화 뿐 아니라 알란 파커 감독의 <앤젤 하트>에서는 음울한 주인공으로 분했었고, <성 프란체스코> 같은 영화에서는 선량한 수도사 역할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기보다는 묘한 매력을 가진 프리티 페이스의 남자 배우의 이미지로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권투선수로 데뷔를 하고 자신의 얼굴을 권투와 성형으로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얼굴의 악역에 한정된 조연급 배우로 다시 영화에 조금씩 나타나던 그가 <더 레슬러>로 돌아왔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킨 영화 <더 레슬러>는 연이어 들려오는 남우주연상 수상 소식들로, 이 영화가 작품성을 보증할 만한 감독인 대런 아로노프스키만의 영화가 아니라, 어쩌면 미키 루크의 영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점점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아트하우스 모모의 "아카데미의 보석들" 영화제에서 배우 미키 루크가 아닌 인간 미키 루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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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챔피언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화려한 레슬러가 이제 한물 간 선수로 동네에서 열리는 사인회에서 푼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퍼마켓에서 일하다가 다시 한번 마지막 경기를 펼친다는 줄거리는 사실 많은 스포츠 영화에서 보았을지 모르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가슴을 파고드는 연출은 이 영화를 단순한 스포츠 드라마 이상으로 만든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그럴듯하게 재기에 성공하는 스포츠 영웅의 드라마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서 버티어 내고자 하는, 자신의 무대를 쉽사리 떠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단절된 인간 관계를 다시 이어보려고 노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더 레슬러>에서는 자신의 몸을 차갑고 딱딱한 링에 던지면서 하루하루 벌이를 이어나가는 레슬링 선수들의 인간적인 아픔과 투혼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지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과거의 영광이 오히려 아픔으로 다가오는 챔피언의 애환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랜디 (미키 루크)가 수퍼마켓 샐러드 코너로 어두운 복도를 통해 내려가던 장면에서, 관중들의 아련한 환성이 환청처럼 들려오다가 현실로 들어서서 초라한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는 그 냉랭한 장면 전환은 그에 대한 연민을 극대화시킨다. 이외에도 영화 내내 랜디의 컨디션이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섬세한 음향 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감정 상태에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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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붙일 데 없는 랜디가 다가가 의지하고자 했던 캐시디 역할의 마리사 토메이는 꽤 좋은 연기력에 비해 한동안 주목할 만한 역을 맡지 못했던 배우이다. <더 레슬러>는 캐시디 역으로 화려하게 돌아온 그녀에게도 어떤 의미에서는 재기작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맨몸을 던져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스트립 댄서인 그녀는 직업적으로도 레슬러와 많이 닮아 있으며, 젊은 댄서들에 비해서 한물 간 취급을 받는 그녀는 안타까운 랜디의 정신적 동료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거운 랜디와 캐시디는 너무도 현실적인 캐릭터이자, 그들의 배우로서의 인생이 그 위에 겹쳐지면서, 진솔하고 묵직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노래한 <더 레슬러>이다. 영화를 보는 중간이나 결말에서가 아니라 엔딩 크레딧 부분에서 눈물이 쏟아지게 만드는 것은 랜디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 <더 레슬러>의 가사와 그를 위로하는 듯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영화 내내 담담하게 감정을 이끌어 오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도약하는 랜디의 모습에 이어 흐르던 이 음악을 통해 나는 랜디의 인생을 온몸으로 벅차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처와 후회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현실을 짊어진 사람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는 영화, <더 레슬러>에게, 그리고 미키 루크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찬사와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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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더 레슬러>에는 프로 레슬링과 왠지 어울리는 주옥같은 헤비 메탈 음악들이 적절히 삽입되어 80년대에 대한 감흥을 일으킨다. 랜디와 캐시디가 맥주를 마시며 80년대 음악을 들으면서 90년대 음악을 못마땅해 하는 장면에서 커트 코베인이 다 망쳐 놓았다며 성토하는 장면은 헤비메탈 팬들이 낄낄거릴 만한 부분이다.  
 
ps2.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루시로 나왔던 에반 레이첼 우드가 랜디의 딸로 분해 짧지만 강렬한 연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