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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요코미조 세이지, <이누가미 일족>

'소년탐정 김전일'의 주인공인 김전일(긴다이치 하지메)은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항상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범인을 잡고 말겠다는 특유의 다짐을 한다. 그래서인지 만화를 보면서 김전일의 할아버지인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인물에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누가미 일족'이라는 추리소설을 읽고 나서야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명탐정이 요코미조 세이지라는 소설 작가에 의해 창조된 인물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정체(?)를 알고 나니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보니 긴다이치 코스케는 내가 생각한 명탐정의 이미지와는 약간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추리를 하고 흥분하면 말을 더듬거린다는 특징이 왠지 허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김전일이 평소엔 어리버리하고 멍하다가도 정작 추리에 들어설 때는 명석한 두뇌를 굴리는 것처럼 코스케도 남들이 생각치 못한 사고를 드러내는 속성을 갖고 있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인물을 알게 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누가미 일족'은 전쟁을 틈타 거부가 된 이누가미 사헤라는 노인의 죽음으로 서막을 장식한다. 거대한 부를 거머쥐었던 남자의 유언을 앞두고 이누가미 가의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즈음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누가미 일족의 유언 담당 변호사로부터 의뢰를 제의받는다. 뭔가 불안한 사건이 생길 것 같다는 의뢰서를 읽은 코스케는 이누가미 일가를 찾아가지만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의뢰를 부탁한 와카바야시의 죽음을 목격한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사헤의 유언장이다. 이누가미 사헤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자리에 있던 일족들은 모두 경악하게 된다. 사헤의 재산은 그의 세 딸과 자손들이 아닌 고인의 은사인 다이니의 손녀인 다마요의 선택에 따라 분배가 결정된다. 즉 다마요가 사헤의 손자인 스케키요, 스케타케, 스케토모 중 한 사람을 선택할 경우 재산이 그 사람에게 분배되는 것이다. 또한 다마요가 죽을 경우 그의 행방불명된 또 다른 아들인 시즈마에게 재산이 분배된다는 기묘한 유언을 남긴다. 고인의 마지막 유언은 마치 세 딸의 자식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워 죽길 바란 듯한 악의가 담겨져 있다.

사헤의 유언이 발표된 후 다마요를 둘러싼 이누가미 일가 사람들의 행동은 탐욕으로 가득찬 모습이다. 다마요가 재산을 분배할 핵심적인 인물로 결정되자 이누가미 일족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질시와 분노를 애써 삼킨다. 특이한 것은 다마요라는 여인의 태도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체 비밀을 감춘듯한 그녀의 모습은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다. 한편 사헤의 세 딸은 자매 관계이지만 서로 어머니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서로에 대한 질투와 증오가 담겨 있다. 다마요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재산의 분배가 달라지기 때문에 세 딸은 고약한 유언을 남긴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동시에 서로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대립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인물들 간의 갈등은 결국 살인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이누가미 일족에게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들은 기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국화 인형들 사이에 장식된 희생자의 머리 그리고 거문고 줄로 묵이 졸린 남자의 시체가 하나씩 발생하면서 살인사건은 단순히 재산을 둘러싼 가족간의 살육이 아닌 이누가미 일족에게 원한을 품은 한 여인과 자식의 복수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살인사건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사헤의 세 딸은 희생자들의 살인에서 자신들이 벌인 과거의 악행을 떠올린다. 즉 사헤의 애첩이었던 이오누마 기쿠노가 가문의 보물인 국화와 거문고, 그리고 도끼를 하사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세 딸은 그녀를 찾아가 강제로 재산을 뺏은뒤 그녀와 자식을 영지에서 쫓아낸 것이다. 외부인의 복수극이라는 것을 암시하듯 소설은 전쟁에서 귀환한 의문의 귀환병을 등장시켜 사건의 의문점을 부여한다. 거기에 더해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숨기기 위해 쓴 스케키요의 기묘한 마스크는 그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범행의 동기가 재산 아니면 복수라는 두 가지 속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누가미 일족'은 범인의 정체를 마지막까지 어렴풋이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정작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 그 사람이어서 놀랍다기 보다는 이 사람은 그럴 것 같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는 것이다. 범인이 위에서 언급한 동기에 너무나 맞는 사람이었고 그의 행동도 워낙 악독하고 냉정했으니 정작 범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도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봐야겠다. 추리소설의 묘미가 사건과 전혀 관계없었을 것 같은 무결점의 인물이 범인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때 '이누가미 일족'은 그 점이 조금 아쉽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해 인물들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한 점도 아쉬었다. 예를 들면 사헤의 과거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자신이 숨긴 자식에 대한 감정을 작가가 직접 글로 서술하고 있는데, 독자에게 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볼 땐 바람직하겠지만 한편으론 인물의 심리를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