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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레볼루셔너리 로드>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포기해 버리는 꿈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1961년에 쓰여진 리처드 예이츠의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가 지금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사랑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직업과 꿈 사이의 머나먼 간극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가 더 흘러간 뒤에도 별로 변하지 않은 채 개인이나 가정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과 갈등을 품게 만들 주제가 아닐까. 일상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을 다룬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다지 극적이거나 신선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진지함과 깊이는 바로 일상을 표현해 내는 깊이있는 연출과 배우들이 담아내는 감정의 강렬함에 있다.

뉴욕 맨하탄 교외에 살고 있는 휠러 부부 - 프랭크 휠러와 에이프릴 휠러는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선남선녀가 만나서 행복하게 결혼한 커플로, 주위의 선망의 대상이며, 스스로도 자신들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숨막혀 하기 시작할 무렵, 오래된 사진을 발견한 에이프릴은 파리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는 제안을 프랭크에게 하고,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희망찬 계획을 하는 것만으로 다시금 삶에 생기와 활력을 얻게 된 휠러 부부는 예기치 못한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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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즈>를 비롯하여,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과 결혼과 출산과 육아, 그리고 정체성을 아우르는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편애하는 나로서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해서 볼 수 밖에 없었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결혼을 앞두고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에서부터 아이를 낳고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사람까지, 이 영화를 보고 공감을 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질 듯하다. 가정과 직장과 아이와 현실과 꿈... 감미롭고 로맨틱한 연애의 순간에서부터 폭풍과도 같은 감정 싸움을 지나서 서로에게 잔인하게 남기는 상처, 그리고 화해의 순간, 가끔씩 찾아오는 기쁨과 만족,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보다는 지루함과 갑갑함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찾아오는 가정의 균열.  

연극 공연이 끝난 후 고속도로에서 벌이는 부부의 말다툼이나, 가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부인과 아이들의 소박한 파티, 비슷비슷한 양복을 입은 회사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출근하는 광경이나 무미건조한 사무실 큐비클 속에서 진부하고 무기력하게 직장 생활을 해나가는 사무실 모습 등 현대 사회의 너무도 리얼한 단면들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 영화는 현대화된 사회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가정을 꾸리고 살려면 직장이 필요하고, 좋아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매일매일 출근을 해야 하며,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포기해 버리고,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것. 특히나 미국의 중산층의 경우에는 아이가 생기면 조용한 교외로 이사하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지며, 그곳에서 지루하고 남들과 똑같은, 무덤과도 같은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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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일상"과 "정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신요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존"이며, 진실에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좌절된 인물은 에이프릴이다. 존 역할을 인상적으로 해낸 마이클 쉐넌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자신의 연기를 각인시켰으며, 많은 명대사들을 멋지게 소화해낸다.

"희망없는 공허함. 이제야 말이 통하는 군요.
 많은 사람들이 공허함까지는 인정하지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죠."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의 대사, "I'm glad I'm not gonna be that kid."

영화 속에서 핵심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존은, 어쩌면 이 세상이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살기에는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세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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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을 계획하며 한동안 꿈에 부풀었던 커플. 하지만 아버지처럼 평생을 이름없는 회사원으로 사는 것을 두려워 했던 프랭크는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된 삶을 선택한다. 파리에서의 삶에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에이프릴의 꿈은 현실적인 제약들로 인해 좌절된다.

"누구나 진실이 뭔지 알지만, 진실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가죠.
 그들은 진실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단지 거짓에 익숙해질 뿐이에요."

에이프릴이 프랭크를 설득했던 말들은 공허하게 허물어져 버리고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자리한 그들의 가정에는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영화를 끝내는 대신에, 그 사건 이후에 다시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샘 멘데스의 연출은 리얼리즘을 한층 더 배가시킨다. 캐시 베이츠(이 아주머니는, 생각해보면 <타이타닉>에서도 이 두 커플 곁에서 조연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가 분한 헬렌과 그의 남편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관계의 비정함과 위선, 그리고 가식적인 부부 관계의 공허한 초상을 인상적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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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 완전히 물이 오른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실제 남편인 샘 멘데스의 열정적인 연출과 함께 더욱 활활 타오르는 듯 하며,  그녀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며 상대역을 호연한 디카프리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세심한 시대 고증과 토머스 뉴먼의 비장한 음악 또한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이 영화는, 보고 나서 한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또 자신을 계속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제대로 발견하기도 전에 현실 속에 파묻혀서 취직과 결혼과 육아라는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코스를 따라 "자유"과 "희망"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완벽하지 못한 제도인 "결혼"에 발목이 잡힌 채,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 이런 삶이었는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인생의 의미와 결혼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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