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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그랜 토리노] 인생의 황혼기에도 식지 않는 분노와 혈기를 간직한 카우보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영어에 "old and wise"라는 표현이 있듯이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현명해져야 한다고, 또 세상 일에 좀더 너그러워져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 나는 현명하지도 너그럽지도 않은,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분노하고 불만에 가득찬 한 노인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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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이 못마땅하고 항상 화가 나 있는 노인이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던 월트와는 달리 일본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아들, 할아버지가 죽으면 뭘 물려받을까에만 관심있는 버르장머리 없는 손주들, 교회에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신부가 설교를 하고 있고, 동네가 아시아계 이민자들로 들어차면서 잔디나 정원 관리는 물론이거니와 주택의 외관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주치의를 찾아간 병원에서는 낯선 아시아 여인이 담당의로 바뀌어있고, 길에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은 게으르며 폭력을 일삼는 양아치들 뿐이다.

낯선 이가 와도 짖지도 않는 순하디 순한 개 한 마리가 가족을 대신하는 외로운 이 노인은 불만스러운 세상 일에 대해 낮은 소리로 (마치 으르렁대듯이) 혼자서 읊조린다. 세상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 그렇다고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으니 그냥 조용히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가끔씩 오래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거나 이발소에서 거친 농담을 주고 받는 게 소일거리의 전부였던 그가 어느날 자신의 앞뜰을 침범한 이방인들에게 총을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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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있었던 "시사IN 신년강좌 시리즈"를 네 번 정도 들었었는데, 그 중에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과 딴지일보 총수로 유명한 김어준의 대담 중에 김어준이 정혜신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어떤 남자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냐?"고. 그 때 정혜신은 "화를 잘 내는 남자가 멋있다"고 답을 했었다. 물론 무턱대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남자가 멋있다는 말이 아니라, 분노를 잘 하고, 쉽게 순응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남자가 멋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의 경계를 침범했을 때의 반응이며, 그만큼 자신의 주관이나 가치관, 원칙이 확고한 사람이어야 화를 낼 수 있다고 말이다.

월트가 총을 들게 한 분노는 자신의 물리적인 영역, 앞뜰에 대한 침범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약자를 괴롭히는 불량배들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인적없는 도로에서 소녀 수를 괴롭히는 흑인 불량배들 앞에 나섰던 때는 단순히 후자에 해당하는 분노이다. 월트는 걸핏하면 이탈리아인이니 유태인이니 아일랜드인이니 인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편견에 가득찬 노인이지만, 인생의 오랜 경험을 통해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전쟁의 쓰디쓴 경험을 통해 폭력과 살인의 대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는 노인이다. 하지만 그는 잘못되어 가는 세상에 대해 가만히 방관하지 않는다. 불같은 분노를 차갑게 드러내 보이고, 필요할 때는 약자를 위해 총을 들기도 한다.
 
총을 들고 이웃의 아시아계 가족을 보호해 준 것을 계기로 이들과 내키지 않는 교류를 하기 시작한 월트는 문화의 차이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하게 되면서 그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그 모든 차이를 관통해서 공유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애정을 나누고 따뜻한 배려를 시작하게 된다. 월트가 이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을 알게 되면서, 그는 소년 타오가 건전하게 그리고 남자답게 자랄 수 있도록 인도하며, 타오의 가족은 그에게 있어서 어느새 보호해 주고 싶은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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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낮에도 총을 소지하고 돌아다니지 않으면, 폭력에 노출되기 쉬우며, 직접 총을 들고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미시간의 허름한 동네는 사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잘 어울리는 서부시대의 무법천지의 공간과도 비슷한 곳이다. 게다가 여러 인종과 민족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만큼 갈등과 충돌의 위험이 곳곳이 도사리고 있다. 갱단처럼 보이는 타오의 사촌과 그 친구들은 타오를 폭력과 범죄의 길로 끌어들이려고만 들고 타오가 이들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와 보인다.

한국전에서 비록 전장에서였지만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에 지고 살아온 월트는, 그외의 인생에서는 그의 고해성사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 나쁜짓이라고는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 한번 키스한 것, 세금을 한번 떼먹은 것 정도에 불과한 선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가구를 부숴가면서 자신의 주먹에서 피가 날 때까지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지만, 동시에 폭력으로 행한 복수의 결과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치밀한 계획을 통해 자신의 정의를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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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서 심술맞은 성격에 고약한 심보를 가진 노인, 또는 온화하고 현명한 캐릭터의 따뜻한 노인 등 영화에 흔히 조연으로 등장하는 노인 배우들에 비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확실히 독보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긴 하다. 190cm에 이르는 키에다가 아직도 꼿꼿하고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부 영화에서 맡았던 전설적인 총잡이 역할에서 나오는 묵직한 포스, 그리고 더티 해리 시리즈의 형사 해리 캘러한이 지닌 냉철한 카리스마가 그를 평범한 노인으로 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가 저음의 목소리로 내뱉는 대사나 농담은 절대로 장난처럼 들리지 않는 무게와 파워를 가진다. 하지만 그의 강한 포스보다도 더 강하게 버티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이 영화를 감동적인 드라마로 만들고 있다.

80을 바라보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해서도 불의를 보면 여지없이 얼굴을 찌푸리고,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는 이 멋진 노인은 여전히 식지 않는 분노와 혈기를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카우보이이다. 영화 <그랜 토리노>를 통해 다시 한번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진한 감동을 선사한 그가, 또한 그 어떤 젊은 감독보다도 왕성하게 창작을 계속하고 있는 그가, 앞으로도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ps. 이 영화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들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데,
        재즈 뮤지션이기도 한 카일 이스트우드는 영화음악에 참여했으며,
        배우 스코트 이스트우드는 흑인 불량배들과 맞닥뜨릴 때 수와 동행한
        얼빵한 백인청년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