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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아라빈드 아디가, <화이트 타이거>



최근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면 퀴즈쇼에서 거액의 상금을 거머쥔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인도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슬럼가에서의 비참한 생활과 종교 갈등으로 인한 비극, 그리고 빈부의 격차가 만들어낸 신분적인 제약 등의 모습은 결코 외면하기 힘든 인도의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인도 사회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은 고대의 카스트 제도가 현대에서도 내려와 극복할 수 없는 빈부의 격차를 이어간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잃어버린 체 자신의 현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 인도에서 고착화된 신분차별과 빈부 격차를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슬럼독 밀리어네어'처럼 퀴즈쇼를 통해 극적인 성공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사회에서 구속한 신분의 굴레를 스스로 뛰쳐나갈 것인가. 인도 출신의 아라빈드 아디가가 쓴 '화이트 타이거'는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자신을 '화이트 타이거'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당돌하게도 중국의 원자비오 총리에게 밤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인도의 성공한 기업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성공담을 담은 화이트 타이거는 자신의 편지를 통해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인도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이 저질러야 했던 끔찍한 살인의 추억을 더듬어간다. 자신의 주인인 아쇽을 살해했다고 거침없이 고백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남자는 아쇽이란 남자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주인을 배신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렀을까 하고 말이다. 냉소와 조롱으로 가득찬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화이트 타이거는 어린 시절 교육을 제대로 받았더라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었지도 모른다. 하지만 끔찍한 가난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바라던 인간다운 삶의 기회마저 박탈하며 그를 찻집으로 몰아내 버린다. 어린 시절부터 찻집에서 석탄을 깨며 손님들의 시중을 들던 그는 남들보다 재빨리 기회를 잡아야 정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운전기사로 일하면 거액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화이트 타이거는 가족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운전을 필사적으로 배워 극적으로 황새의 아들인 아쇽의 운전기사가 되는데 성공한다. 과자를 만드는 계급인 할와이 출신인 화이트 타이거가 개인 운전기사로 신분상승한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성공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이트 타이거는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넘을 수 없는 신분의 격차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아끼는 아쇽의 충실한 하인으로서 택시기사 업무를 하지만 아쇽과 그의 아내인 핑크 마담의 생활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더 나은 신분 상승의 욕구를 꿈꾼다.

흥미로운 점은 화이트 타이거의 주인인 아쇽이란 남자이다. 미국에서 생활한 후 인도 사회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품고 도착한 아쇽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이유로 홀대하는 그의 가족들과 달리 화이트 타이거에게 인정을 베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쇽은 인도에서 크나큰 좌절을 겪는다. 미국식 생활에 익숙한 그의 아내는 하루빨리 인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아쇽은 애써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진다. 게다가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에게 굽신거리며 뇌물을 바쳐야 되는 인도의 썩어빠진 현실을 지켜본 아쇽은 점점 타락해가기 시작한다. 아쇽이 점점 타락의 나락으로 빠져갈 수록 화이트 타이거는 자신을 둘러싼 신분제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구를 키워간다.

화이트 타이거는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업가로 성공하기 위해선 아쇽이 정치인들을 찾아갈 때마다 바치는 거액의 비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것을 훔치는 순간 끔찍한 파멸을 각오해야 한다. 그가 범죄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까닭은 개인적인 양심이나 법의 심판이 아닌 신분제가 만들어낸 '닭장' 때문이다. 단지 돈을 훔쳤다고 해서 자신만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남자의 냉소적인 편지글은 신분제가 만들어낸 닭장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이 꿈을 펼쳐보지 못한 체 현실에 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에겐 닭장이 있잖아요.
인류 역사의 어느 장에도 이처럼 소수의 인간들이 이처럼 대다수에게 이처럼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아비오 선생님. 이 나라의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나머지 99.9 퍼센트를 - 어느 모로 봐도 그들에 못지않게 강하고, 못지않게 재능 있고, 못지않게 똑똑한 나머지를 - 훈련시켜서 영원한 예속의 상태에서 살도록 만든거죠. 그것은 얼마나 튼튼한 속박의 굴레인지, 그의 손에 해방의 열쇠를 쥐어주더라도 그는 욕설을 하며 그걸 되던져버릴 정도입니다. (p204)

둘째 의문에 대한 답: 자기 식구들이 파멸하는 꼴을 볼 각오가 된 사람만이 - 그들이 주인들에 의해서 쫓기고, 두들겨 맞고, 산 채로 불타 죽임을 당하는 꼴을 볼 각오가 된 사람만이 - 닭장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는 어려운 노릇이고, 괴물이 되어야 하고 비정상적인 성격이라야 가능하단 말이지요. (p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