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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살기 위하여] 새만금 방조제의 진실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살기 위하여
이강길 감독, 2006

바로 지금,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다큐멘터리

이강길 감독의 다큐멘터리 <살기 위하여>를 보는 동안 2003년 여름을 떠올렸다. 그해 여름 나는 전투경찰의 신분이었고, 부안 핵폐기장 사태로 인해 부산에서 부안까지 출동을 나가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끔찍한 날들의 연속이었고, 덕분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침내 부산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명령이 떨어졌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새만금 방조제 위에 올라갈 기회를 얻었다.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저 멀리 반대편 방조제 끝이 보였다. 그동안 온갖 피로에 찌들어 있던 우리들은 그저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그간의 피로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가 서있던 곳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환경 파괴가 자행되던 곳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살기 위하여>는 바로 그 새만금 방조제의 진실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이강길 감독은 2006년 대법원 판결로 새만금 간척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삶의 터전과도 같던 갯벌을 잃어버리게 된 계화도 주민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낸다. 새만금 사업의 폐해를 신문과 방송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다면, 영화 속 죽어가는 갯벌의 모습에서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환경파괴의 실상은 충격적일 것이다. 물이 들어오지 않아 말라붙은 갯벌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조개와 게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이강길 감독은 “지금 새만금 갯벌은 사람으로 치자면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라며 이제 곧 내부공사가 시작되면 호흡기마저도 뗄 위기에 처했다고 말한다. 처참하게 생명을 잃어가는 새만금 갯벌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살기 위하여>는 단순히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죽어가는 새만금 갯벌을 담아냄과 동시에, 새만금 갯벌에 기대어 살아온 계화도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집단의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데도 신경을 쏟는다. 특히 주민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대책위원회와 주민들의 대립은 새만금 문제가 비단 국가만의 잘못이 아닌 그것에 대항해온 이들의 내부적인 한계에서도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대책위원회와 주민들은 어느 집단에서나 존재하기 마련인 의견 대립과 갈등을 겪지만, 그것을 민주적인 절차로 해결하는 데는 힘을 합치지 못한다. 그러한 대립과 반목 속에서 개발의 주체인 국가는 야금야금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해 나간다. 이는 단지 새만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이러한 문제들은 용산 철거민 참사와 대운하 논란 등으로 이름을 바꿔 계속되고 있다. <살기 위하여>는 어떠한 해결책을 내리지는 않지만, 대신 이러한 사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없다는 점, 새만금 갯벌과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살기 위하여>의 아쉬운 점이다. 물론 이는 <살기 위하여>가 그동안 이강길 감독이 꾸준히 작업해온 새만금 연작 중 하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살기 위하여>는 아쉬운 점들이 있음에도 그것으로 영화의 가치가 깎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이 봐야 하는 다큐멘터리다.


<워낭소리>로 아주 잠시나마 독립영화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개봉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할매꽃>이 <워낭소리>에 못 미치는 관객 수를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워낭소리>에 대한 주목은 단발적인 화제성에만 머문 것 같다. 상업영화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시대의 문제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기에 독립영화는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살기 위하여>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내게 새만금 방조제는 2003년 여름을 떠올리는 추억의 한 페이지에 불과했다. 이 영화를 본 뒤 내게 새만금 방조제는 추억이 아닌, 바로 지금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의 파괴의 상징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