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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블랙 아이스] 가면 속에 감춰진 현대인의 불안


블랙 아이스 (Musta jää)
페트리 코트비카 감독, 2007년

정교하게 짜인 심리 스릴러

불행은 그렇게 불현듯 찾아온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던 사라 역시 자신의 행복이 그렇게 산산조각 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마흔 살 생일을 맞은 사라는 남편의 정성어린 생일 축하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콘돔 2개로 인해 지금까지 누려온 행복에 균열의 그림자가 감춰져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 의심은 곧 진실로 밝혀지고, 사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남편이 숨겨둔 애인 툴리에게 접근한다. 배신의 아픔은 이내 복수의 칼날로 변해간다.

낯선 핀란드에서 온 페트리 코트비카 감독의 <블랙 아이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로 막을 연다. 불륜과 배신, 복수, 그리고 그 속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충돌은 최근 한국 드라마의 트렌드인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막장 드라마들이 복수에 초점을 두며 관객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과 달리 <블랙 아이스>는 복수가 아닌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자신이 막장 영화가 아님을, 정교하게 짜인 심리 스릴러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불륜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이 치정극의 길을 걷지만, <블랙 아이스>는 심리적 긴장에서 비롯되는 서스펜스에 기대고 있는 만큼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제목인 ‘블랙 아이스’는 도로 표면에 얇게 언 살얼음을 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도로처럼 보이지만 그 본모습은 미끄러움 그 자체인, 순식간에 위협적인 존재로 돌변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을 가리킨다. <블랙 아이스>는 인간관계 속에도 이런 ‘블랙 아이스’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의 진심을 점점 더 알 수 없는 현대인의 불안이 바로 그 근거다. 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언제 어디서든 그 자리에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간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가면무도회 시퀀스를 인물들 사이의 심리가 극으로 치닫는 절정에 배치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면무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감춘 채 다른 이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릴이 느껴지는 흥미로운 만남들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현대인의 삶 역시 겉으로 가면을 쓰지 않았을 뿐 실상은 가면무도회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진심을 감추고 있는 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블랙 아이스’로 인해 미끄러지고 상처를 입을 지 모를 일이다. 사라에게 예고도 없이 불행이 찾아온 것처럼, 그리고 그런 사라로 인해 툴리의 마음에 생채기가 남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블랙 아이스>는 심리적 긴장에만 의지한 나머지 영화적 재미를 놓치고 만다. 복수의 칼날을 갈던 사라는 눈앞에 다가온 복수의 순간에서는 정작 머뭇거리기만을 반복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사라는 가해자나 다름없는 남편의 애인 앞에서 오히려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그럼에도 끝내 복수를 자행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사라의 모습은 인간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우유부단해 보인다. 이로 인해 불륜과 복수로 시작을 연 영화도 어떤 결말로 마무리를 지을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까지 서스펜스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인물들의 원숙한 연기, 그리고 핀란드의 풍경에서 묻어나는 스산함 때문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