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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피쉬 스토리] 허풍도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피쉬 스토리 (フィッシュストーリー)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 2009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영웅담

순수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따위는 아무도 믿지 않는 세상이 돼버렸다. 그런데 여기, 자신들의 음악이 언젠가는 세상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믿는, 자신들의 음악에 담긴 진심이 언젠가는 꼭 사람들에게 닿을 것이라고 믿는 밴드가 있다.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에 고래도 달아날 거야”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 ‘Fish Story’의 주인공 ‘게키린(逆鱗)’이 바로 그들이다. <피쉬 스토리>는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데뷔 1년 전에 녹음한 무명의 펑크 밴드 ‘게키린’의 노래가 오랜 세월을 지나 세상을 구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영웅이 없는 영웅담이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에 이어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과 소설가 이사카 코타로가 또 다시 콤비를 이뤘다. <피쉬 스토리>는 이사카 코타로의 단편소설을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이 다시 한 번 영화화한 작품이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미스터리한 플롯의 전개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사카 코타로의 원작을 훌륭하게 영화화했던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은 이번 <피쉬 스토리>에서도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영상으로 재현해내는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혜성과의 충돌로 인해 지구 멸망이 5시간 남은 2012년의 가까운 미래에 시작되는 영화는 1975년과 1982년의 과거, 그리고 2009년의 현재까지 방대한 시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바로 ‘게키린’이 남긴 노래 ‘Fish Story’다. 눈앞에 다가온 지구 멸망의 순간, 무명의 밴드가 남긴 한 곡의 노래가 세상을 구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피쉬 스토리>는 뻔뻔하게 그려 나간다.


지구 멸망이라는 엄청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피쉬 스토리>는 거대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피쉬 스토리>가 웅변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 때로는 위대한 힘이 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메시지다. <피쉬 스토리>에는 영화 속에서도 언급되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자신의 몸을 내던져 필사적으로 지구 멸망을 막는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할 뿐이다. 자신들의 음악에 담긴 진심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닫기를 바라는 ‘게키린’의 멤버들, 그런 ‘게키린’의 음악을 끝까지 응원하고 지지하는 매니저 오카자키, ‘게키린’의 ‘Fish Story’를 들으며 소심함을 벗어던지는 대학생 마사시, 정의의 사도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며 자란 청년 세가와, 그리고 세가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여고생 아사미까지 <피쉬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들의 삶이 서로에게 조금씩 변화를 끼치면서 평범함은 마침내 멸망의 위기 앞에 놓인 세상을 구하는 위대한 힘으로 발전해간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황당무계한 상상력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피쉬 스토리>가 전하는 울림은 생각보다 크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평범한 모습들처럼 우리의 삶도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을 넘나들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도 영화가 만들어내는 감동에 한 몫을 한다.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묶어내며 폭발적인 감정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사카 코타로 특유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영화적으로 표현해낸다. 알쏭달쏭하게 진행되던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한 번에 정리해주며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의 엔딩은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연출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피쉬 스토리>는 논리적인 설득력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마치 그럴싸하게 그려내면서 논리적인 설득 대신 믿음을 통해 호소한다. 이 호소력이야 말로 <피쉬 스토리>가 관객의 가슴에 남기는 여운의 정체다.


‘게키린’의 멤버들은 ‘피쉬 스토리’를 단순히 ‘물고기 이야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피쉬 스토리(fish story)’에 담긴 진짜 의미는 따로 있다. 낚시꾼이 자신이 잡은 물고기의 크기를 부풀려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바로 허풍이다. 허풍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니! 그런데 <피쉬 스토리>는 그렇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언젠가는 자신들의 음악에 담긴 진심을 누군가 알아줄 거라는 그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피쉬 스토리>가 말하는 핵심이다. 그러니까 순수의 시대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진심이 담겨 있다면 음악도 세상을 구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피쉬 스토리>는 우리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있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