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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바로 이 몸에서, 이 생에서


몇 달전, EBS를 통해 장 자끄 아노의 '티벳에서의 7년'이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하인리히 하러라는 오스트리아 모험가가 우연곡절 끝에 티벳에 도착한 뒤 어린 아이였던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을 통해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온 영화였다. 또한 중국 공산당 정부가 무력을 동원해 티베트를 점령하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티베트에 대해 모르고 있던 역사적인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티벳에서의 7년'은 현재의 티베트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문화 그리고 역사적 갈등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또한 영화가 티베트의 생활과 종교 등을 묘사하고 있지만 서양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정작 티베트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인물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바로 이 몸에서 이 생에서'라는 책은 앞에서 언급한 현재의 티베트 인들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역사적 갈등에 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BBC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1년 동안 티베트 제 3의 도시인 갼체에 머무른 저자는 마을 안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녀의 성과는 5부작 다큐멘터리를 통해 완성되었지만 여러가지 사유로 끝내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또한 저자는 마을의 무당인 체텐과 그의 가족인 릭진 씨의 가족을 중심으로 마을 주변의 다양한 계층, 연령,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티베트의 종교와 관습, 문화 그리고 티베트와 중국 간의 미묘한 갈등을 서술하고 있다. 

릭진 씨 가족을 통해 저자는 티베트에 전통적인 종교와 관습이 여전히 존재하면서도 현대적인 문명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티베트의 무당인 체텐은 곡사포를 이용해 우박을 방지하는 기술의 유입으로 인해 일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을 안에 병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체텐을 찾아와 치료를 받는다. 티베트의 신앙에 근거한 구식의 치료법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의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문화의 우월성에 근거하여 구식의 치료법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점을 인식함으로써 전통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결코 미개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너무나 열악한 병원의 시설과 인력, 그리고 가난한 티베트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중국의 의료제도는 결국 티베트인들이 여전히 전통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릭진 씨 가족의 가장인 로가와 돈단 그리고 체탠이 양드론이라는 여성을 부인으로 공유하는 일처다부제의 관습을 통해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려는 저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티베트인들의 결혼은 양자의 사랑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티베트의 점술을 통해 적절한 배우자를 찾고 결혼 직전까지 여성에게 자신의 결혼 상대를 밝히지 않도록 하고 있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가 맺어준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도 억울한데 결혼 직전까지 자신의 배우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목격한 저자는 마치 불공평한 차별을 접하는 것처럼 분노하지만 섣불리 그들의 관습을 미개하다고 비판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저자는 일처다부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릭진 씨 가족과 인터뷰함으로써 그들의 관습을 이해하려고 한다. 자칫하면 그들의 모욕을 살 수 있는 일처다부제의 관습에 대해 솔직한 답변을 털어놓는 티베트 여성인 양드론과의 대화는 타문화를 이해하려는 저자의 신중한 태도가 느껴진다. 저자는 양드론의 주도로 삼형제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통해 티베트의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묘사함으로써 여전히 티베트 사회는 남성 주도의 사회임을 드러낸다.  

한편 저자는 한 때 승려였지만 티베트 민중 봉기와 문화 혁명 이후 사원에서 쫓겨나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릭진 씨 가족의 가장인 밀라는 한 때 종교에 귀의한 승려였지만 중국 정부의 불교 탄압으로 사원에서 쫓겨난 후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문화 혁명 시절 공산당 간부들에 이끌려 자아비판을 하면서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들을 자백해야 했던 한 승려의 과거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비극을 남의 탓으로 비난하지 않은 체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를 통해 일어난 인과응보라고 말하며 그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려 한다. 수많은 외압으로 인해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박탈당했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믿음을 고수하며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한 노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 몸에서, 이 생애에서' 고난을 극복하려는 티베트인의 강인한 정신이 느껴진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일말의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저자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교육 정책이나 복지 정책 등을 통해 중국 정부의 대 티베트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몇몇 티베트 인들의 사연을 통해 티베트 민중들의 봉기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음을 비판하지만 티베트의 독립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나 의견은 비교적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중국인인 그녀의 입장에서 티베트의 독립에 관해 섣불리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난처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국인이지만 티베트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적개심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 스스로 티베트 문화를 받아들이는 저자의 모습은 결코 위선적이고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양한 계층의 티베트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티베트를 받아들이는 저자의 태도는 무척 세심한 편이며, 그들의 독특한 종교나 관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그들의 문화가 미개하다고 비난하지 않고 다른 면에서 접근함으로써 티베트인들을 보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티베트가 독특한 영적 존재로 남길 바란다는 그녀의 마지막 글처럼 나 역시 티베트가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