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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유산 (In Custody, 1994)


이스마일 머천트는 제임스 아이보리와 함께 '머천트 앤 아이보리 프로덕션'이란 영화 제작사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시인의 유산'은 주로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의 제작자로 활동하던 이스마일 머천트가 직접 감독을 맡은 영화라는 점이 독특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우르두 어로 시를 쓰는 한 노인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노시인과 그를 존경하는 한 남자의 만남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도에서 쓰이는 언어에 대해 찾아보니 우르두 어는 파키스탄에서는 3개 공용어 중 하나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도에선 헌법에서 규정한 15개 공용어 중 하나라고 한다. 이스마일 머천트는 영화를 통해 인도 내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는 우르두 어의 아름다움을 표현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대학에서 힌디어를 가르치는 교수인 데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정 내에서 부인에게 식사를 대접받는 가부장적인 모습과 대비해 자신이 가르치는 힌디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모습이 대조적인 느낌이 든다. 그는 힌디어를 가르치지만 정작 그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는 다름아닌 우르두 언어이다. 언젠가 자신이 쓴 우르두 어 우연히 자신을 찾아온 동창이 자신의 잡지에 기고할 인터뷰 기사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벤은 자신이 존경하던 시인 중 한 명인 누르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어릴 적 선생님에게 배운 우르두 어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데벤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감추지 못한 체 누르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누르의 집에 도착한 데벤은 그의 삶이 젼혀 평탄치 못함을 깨닫는다. 혼자서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들고 풍만한 풍채를 가진 누르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에게 이끌리다시피 살아가며 마치 남은 인생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던 것이다. 누르의 추종자들은 그를 존경하는 자세로 그의 시를 배우는 것이 아닌 단지 유흥상대로 여기며 술을 마셔대고 주변에 붙어다니며 무전취식을 하고 있다. 게다가 누르의 두 부인은 서로를 증오하며 싸우고 있으며,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베굼은 궤양으로 고통받는 누르를 외면하다시피 하며 처음 찾아온 데벤에게 누르의 토사물을 치울 것을 명령한다. 자신이 존경하는 노시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조차 받지 못하며 그가 적은 시들이 휴지처럼 돌아다니는 현실에 경악한 데벤은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데벤은 누르로부터 자신의 시를 들려준다는 제안이 담긴 편지를 받은 후 다시 그의 집을 찾기로 결심한다. 누르의 집을 찾은 데벤은 그의 시가 둘째 부인인 베굼에 의해 불려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누르의 시로 노래를 부르지만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그녀의 외모에 관심을 기울인다. 베굼을 향해 돈을 뿌리는 남성들의 모습은 한 때 위대했던 누르의 시가 구경거리를 위한 음악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드러낸다. 위대한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누르는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결국 누르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누르는 유일하게 자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데벤의 정성에 답하듯이 그에게 자신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시들을 들려주고 싶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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