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머천트는 제임스 아이보리와 함께 '머천트 앤 아이보리 프로덕션'이란 영화 제작사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시인의 유산'은 주로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의 제작자로 활동하던 이스마일 머천트가 직접 감독을 맡은 영화라는 점이 독특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우르두 어로 시를 쓰는 한 노인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노시인과 그를 존경하는 한 남자의 만남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도에서 쓰이는 언어에 대해 찾아보니 우르두 어는 파키스탄에서는 3개 공용어 중 하나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도에선 헌법에서 규정한 15개 공용어 중 하나라고 한다. 이스마일 머천트는 영화를 통해 인도 내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는 우르두 어의 아름다움을 표현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대학에서 힌디어를 가르치는 교수인 데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정 내에서 부인에게 식사를 대접받는 가부장적인 모습과 대비해 자신이 가르치는 힌디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모습이 대조적인 느낌이 든다. 그는 힌디어를 가르치지만 정작 그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는 다름아닌 우르두 언어이다. 언젠가 자신이 쓴 우르두 어 우연히 자신을 찾아온 동창이 자신의 잡지에 기고할 인터뷰 기사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벤은 자신이 존경하던 시인 중 한 명인 누르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어릴 적 선생님에게 배운 우르두 어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데벤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감추지 못한 체 누르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누르의 집에 도착한 데벤은 그의 삶이 젼혀 평탄치 못함을 깨닫는다. 혼자서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들고 풍만한 풍채를 가진 누르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에게 이끌리다시피 살아가며 마치 남은 인생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던 것이다. 누르의 추종자들은 그를 존경하는 자세로 그의 시를 배우는 것이 아닌 단지 유흥상대로 여기며 술을 마셔대고 주변에 붙어다니며 무전취식을 하고 있다. 게다가 누르의 두 부인은 서로를 증오하며 싸우고 있으며,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베굼은 궤양으로 고통받는 누르를 외면하다시피 하며 처음 찾아온 데벤에게 누르의 토사물을 치울 것을 명령한다. 자신이 존경하는 노시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조차 받지 못하며 그가 적은 시들이 휴지처럼 돌아다니는 현실에 경악한 데벤은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데벤은 누르로부터 자신의 시를 들려준다는 제안이 담긴 편지를 받은 후 다시 그의 집을 찾기로 결심한다. 누르의 집을 찾은 데벤은 그의 시가 둘째 부인인 베굼에 의해 불려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누르의 시로 노래를 부르지만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그녀의 외모에 관심을 기울인다. 베굼을 향해 돈을 뿌리는 남성들의 모습은 한 때 위대했던 누르의 시가 구경거리를 위한 음악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드러낸다. 위대한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누르는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결국 누르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누르는 유일하게 자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데벤의 정성에 답하듯이 그에게 자신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시들을 들려주고 싶다고 제안한다.
더보기
누르의 시들을 경청할 천금같은 기회를 얻은 데벤은 그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시인의 시를 담아내는데 시큰둥한 대학 관계자들은 그에게 중고 녹음기를 살만한 연구자금만을 제공한다. 게다가 어리숙한 데벤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톡톡한 댓가를 치르고 만다. 가전제품을 파는 주인은 녹음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촌을 조수로 쓰라고 지시하며, 누르의 첫째 부인은 그의 시를 녹음하는 댓가로 별도의 뒷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천신만고 끝에 누르와 단독으로 시를 녹음할 기회를 얻은 데벤은 녹음기의 마이크를 대고 그가 들려주는 시를 녹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누르를 둘러싼 인물들의 방해로 제대로 녹음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누르의 문하생들은 용케 장소를 찾아와 그의 주변에 들러 붙어 데벤의 녹음을 방해하고, 어리숙한 조수는 중요한 순간마다 녹음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른다. 게다가 한참 만담을 늘어놓다가 느닷없이 시를 읊는 누르의 방식은 데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죽음을 감지하듯이 힘없이 모든 것을 마무리하려는 누르의 모습을 본 데벤은 그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을 중단한다.
결국 데벤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 누르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는 주변 소음들에 묻혀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한 것이다. 데벤의 녹음물을 들은 대학 관계자는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자리를 박차고 만다. 게다가 그의 친구는 녹음의 대상이 형편없어 녹음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가전점 주인을 옹호하며 데벤의 항의를 무색케 한다. 비록 시인의 목소리를 남기려는 데벤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지만 그의 집 앞으로 보내진 하나의 우편물은 누르에 대한 그의 노력을 보상하고 만다. 죽음을 앞둔 누르가 그의 심정을 담아낸 시집을 데벤에게 보낸 것이다. 데벤은 시집을 들고 대학 관계자를 찾아가지만 그는 자신의 선조가 남긴 옛집을 허무는데 정신이 없다. 데벤은 허물어가는 옛집을 뒤로 하며 노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를 읽는다. 쓰려져가는 건물의 마지막 모습은 현대 속에서 사라져가는 전통의 파괴를 상징하는 듯 하다. 또한 사라져가는 낡은 건물처럼 위대한 시인이었던 누르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갈 운명임을 암시하는 느낌이 든다. 영화는 그의 장례식 장면을 비추면서 하늘을 향해 날라가는 새들의 모습을 통해 자유로워진 시인의 영혼을 위로한다.
ps1. 샤시 카푸르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인 '세익스피어 왈라'나 '인도에서 생긴 일' 같은 영화에서 준수한 외모를 갖춘 배우였는데, 노년이 된 그의 모습을 영화로 보니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너무 비대해진 그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그가 샤시 카푸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영화 상에서 존경받던 시인이 말년에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도 충격적이지만 샤키 카푸르가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ps2. 누르의 둘째 아내인 베굼은 누르에게 쌀쌀맞은 느낌도 있지만 그녀가 악녀라고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누르의 시를 함부로 도용한 점은 비판받아야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노래로 부름으로써 남자들이 던지는 돈을 받아 살림을 꾸린다. 그런 면에선 적어도 무전취식하는 누르의 추종자들보다 누르에 헌신적인 면도 있다.
ps3. 영화는 남성의 가부장적인 태도의 부당한 모습에 저항하지 못한 체 남편에 헌신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인도의 남성우월주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데벤은 자신이 존경을 바치는 누르에 헌신하는데 반해 자신의 아내에 대해선 쌀쌀맞기 그지없다. 데벤의 아내는 그런 데벤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집에서 살림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자신의 처지를 인내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한편 베굼 역시 남성 중심적인 문학 세계에서 자신의 야심을 이루지 못하는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르가 들려주는 시를 데벤이 녹음했다는 사실을 안 그녀가 데벤을 찾아가 절실하게 자신도 시를 쓰고 있음을 드러내며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데벤은 누르의 시만을 원하며 그녀의 소망을 무시한다. 베굼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누르가 기르던 비둘기들을 새장 밖으로 쫓아내는 장면은 자신의 꿈이 좌절된 한 여성의 분노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