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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arthouse모모

한국영화의 미래를 밝게 비춰주는 영화 <황금시대>


<해운대>의 천만 관객 돌파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이 오가고 있지만, 관객수 숫자놀음을 떠나서, 한국형 블락버스터이든 저예산 독립영화든 간에 좋은 한국영화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최근의 나의 느낌이었다. 워낙에 전반적인 제작 편수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기대작이나 화제작이라는 영화들은 대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인 경우가 많았고, 정말 어쩌다가 한 편씩 볼 만한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황금시대>를 보고나서, "지금 당장 좋은 한국영화는 많지 않지만, 좋은 한국영화 감독은 꽤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한국의 열악한 제작 환경과 빈곤한 투자 구조 하에서 패기있는 감독들이 제작비를 마련하거나 투자를 받기는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뭔가 그럴듯한 상품가치가 있는 영화들 위주로 제작 및 배급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많은 영화인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다행히도 전주영화제 10주년을 기념하여 10명의 감독들에게 단편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졌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옴니버스 영화 <황금시대>이다. 개성 넘치는 감독들이 각자 자유롭게 만든 10편의 단편들은 갖가지 장르가 다양하게 어우러져 각 작품마다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각 단편들의 공통의 주제가 "돈"이다 보니까, 재미 뿐만 아니라 씁쓸한 풍자도 함께 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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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금) 저녁 8시 30분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는 권종관 감독(<동전 모으는 소년> 연출), 김영남 감독(<백 개의 못, 사슴의 뿔> 연출), 남다정 감독(<담뱃값> 연출)의 세 분의 감독이 방문하여 감독과의 대화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모모에 관객이 꽤 많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합류한 윤성호 감독(<신자유 청년> 연출)과 김성호 감독(<페니 러버> 연출)을 포함하면서, 무려 다섯 분의 감독님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화려한 씨네토크 자리가 마련되었다.

첫번째 관객 질문은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님들이 어떻게 작업을 하셨는지, 함께 모여서 기획 회의라도 했는지를 묻는 것이었는데, 다들 바빠서 만난 적은 없고, 각자 통장에 들어온 500만원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했다고 김성호 감독님이 답해주었다. 답변이 너무 솔직하고 담백해서 객석에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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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값>의 남다정 감독에게 "자본주의 시대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세 가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남감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스탭들에게 담뱃값 이상의 보답을 줄 수 있는 영화 제작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라는 순수한 소망을 답변으로 대신해 주었다. 또한 영화 마지막에 비가 오는 장면은 사실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비가 내렸고, 분위기가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냥 비 내리는 장면으로 찍게 되었다는 솔직한 고백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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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 멜로"로 명명된 <동전 모으는 소년>을 만든 권종관 감독은 풋풋하고 순수한 소년이 극단적인 변화를 겪는 이야기를 감성적인 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고, 전작인 <새드 무비>를 기억해 주는 관객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옴니버스의 매력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스탭과 배우들 간의 호흡과 친밀도가 짧고 굵게 갈 수 있어서 좋다는 것과, 장편에 비해서 감독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는 장점을 꼽아 주었다. 캐스팅 질문에 대해서는, 힙합 신동 기파랑을 선정한 과정과 교정기를 끼고 오디션에 온 배우를 그 느낌 그대로 캐스팅했다는 등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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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청년>의 윤성호 감독에게 "영화의 내용과 촛불 집회 장면의 연관 관계"를 묻자, 단순히 "1년 후입니다."라고 명료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특정 정치인을 풍자하기 보다는 대한민국에 대한 풍자를 하고 싶었다는 윤성호 감독은 "부자인 대통령을 뽑으면 나도 부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대한민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장편 영화를 찍을 때에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감성을 표현하는 편이고, 단편 영화를 찍을 때에는 정치적인 농담을 담아내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화려한 출연진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를 핑계로 평소해 친해지고 싶었던 분들을 섭외해서 영화를 찍은 후에 정말로 친해졌다"는 재미있는 답변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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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못, 사슴의 뿔>의 김영남 감독은 제목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제목이 영화를 너무 한정짓거나 상징적이거나 하지 않았으면 해서 영화 속 소재를 이용해서 제목을 지었다고 하였다. 열려있는 엔딩을 원했기 때문에 제목에 의해서 영화가 한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답변이었는데, 그로 인해서, 시적인 느낌이 나는, 의외의 멋진 제목이 탄생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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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멜로"인 <페니 러버>의 김성호 감독은 캐스팅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조원선씨를 애초에 염두에 두고 있다가 캐스팅을 했으며,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함께 작업했다고 답했다. 마지막에 10원 동전을 사용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사랑"을 정리하는 의미이자 "자기 자신"을 정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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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즐겁게 작업했다고 하는 권종관 감독의 이야기나 모든 감독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500만원의 제작비로는 스탭과 배우들의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답이 어렵다"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500만원이 돈 자체로는 큰 돈이지만 스탭들에게는 미안한 금액의 돈이며,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열악한 환경과 숨겨진 고충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 <황금시대>가 "살아가면서 돈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한다는 김영남 감독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모모에서의 첫 씨네토크라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던 윤성호 감독의 말은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위 다섯 편의 영화들 이외에 언급하지 못한 최익환 감독의 <유언>, 이송희일 감독의 <불안>, 김은경 감독의 <톱>, 양해훈 감독의 <시트콤>, 채기 감독의 <가장 빨리 달리는 남자>도 각각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품들이니 기회가 되시는 분들은 영화를 직접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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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의 단편들은 돈에 대한 풍자를 하고 있는 영화들이지만, 이 영화들 역시 돈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어도 영화는 돈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문화 상품이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황금시대>는 영화 자체의 재미나 메시지도 좋았지만, 다섯 감독의 씨네토크를 들으면서, 앞으로 한국 영화의 제작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독들의 전작들을 나열하며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던 관객들이 감독님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늦은 시간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된 이번 씨네토크는, 객석에서 간간이 터져나온 웃음과 진솔한 답변에서 묻어나던 감독님들의 진심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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