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는 종전 직후인 1948년 경찰직을 지원하게 된 안조 세이지부터 그의 아들인 안조 다마요 그리고 손자 안조 가즈야로 이어지는 경찰 3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 책을 봤을 때 '경관의 피'라는 제목에서 으스스한 추리소설을 연상했지만 막상 책을 읽고 나서야 '피'란 단어가 피로 이어진 가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즉 3대에 걸쳐 경찰관 임무를 수행한 한 가문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미스테리나 추리 소설의 장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경관의 피'는 뒷통수를 치는 치밀한 반전이 담긴 추리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건 자체는 안조 세이지 시절에 있던 두 건의 살인 사건과 세이지의 의문스런 죽음이지만 다마요와 가즈야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한 추리나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수사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이 있었던 현장 주변에 살았던 인물들의 증언과 당시 사진들을 통해 진상을 확인하는 과정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연히 의문의 죽음을 밝혀내는 과정은 속도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스테리 소설보다는 일반적인 소설에서 바라본다면 '경관의 피'는 앞에서 언급한 문제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정도로 흥미로운 소설이다. '경관의 피'의 장점은 단지 추리에 국한되어 이야기를 무리하게 이끌기보다는 경찰 3대의 이야기 속에 드러나 있는 인물들의 내면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경찰관들의 심리와 감정을 이입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각각의 인물은 급변화되는 일본의 현대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경찰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자신이 생각하는 내면의 감정과 그들이 살던 시대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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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조 세이지가 경찰 근무를 하던 시절의 일본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이 강제퇴거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환경이 주를 이룬다. 오늘날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아키하바라 같은 중심지역은 종전 직후였던 시절엔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임시촌을 만들어 살아가던 곳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불법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경찰의 대규모 단속을 피해 도망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세이지는 힘없는 불법 거주자들을 쫓아내는 공무를 수행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부랑자나 남창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적인 경관이 되고자 노력한다. 출세를 위해 공안업무에 매진하는 하야세와 달리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경찰관이 되기 위해 세이지는 주재소 근무를 희망한다.
한편 한국전쟁을 지켜본 일본 당국이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면서 좌익활동을 하는 수사관들을 퇴출하는 모습은 이념의 자유를 인정치 않고 핍박하는 일본의 현대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공산주의 활동을 색출하기 위해 일본은 공안 수사국의 활동에 힘을 불어넣어줬고 이로 인해 힘없는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 내부에서는 공안 수사가 노출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두 건의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세이지는 얼핏 보면 다른 범죄처럼 보이는 두 사건에서 일치하는 특징을 발견한다. 홀로 사건의 진상을 찾아가던 세이지는 자신이 근무하는 덴노지 주재소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과연 그는 화재 현장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세이지 편에서 제기된 그의 의문의 죽음은 이후 세이지의 뒤를 잇는 두 사람에 의해 미스테리로 남겨지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 경찰관이 되기로 결심한 다미오는 공안 당국으로부터 학비를 지원하는 대신 대학교의 학생으로 잠입하면서 대학 내부의 좌익 세력들을 관찰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학생이 된 다미오는 경찰이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일본 적군파 세력에 포섭되었을지 모른다는 공안부의 판단에 의해 그들에게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대학생 써클 내부에 잠입하면서 그들을 고발하는 역할을 수행한 다미오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만 자신의 임무에 대해 갈등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내부에 잠입하는 역할을 반복하다보니 자신이 과연 어느 소속인지 분별조차 힘들 정도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 시작하며 그 혼란은 스트레스성 장애로 발전하게 된다. 다미오는 공안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출신청을 하지만 번번히 상부로부터 거부 신청을 받는다. 결국 아버지처럼 가족적이고 믿음이 가는 경찰관이 되지 못할 거라는 좌절감과 두려움은 다미오를 폭력적인 인간으로 변모하게 만든다. 술에서 깨어난 뒤 피범벅이 된 아내의 모습과 아버지를 노려보는 아들 가즈야의 눈빛을 바라본 다미오의 내면은 더욱 죄책감으로 가득차게 된다.
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삼촌과 같았던 가토리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이어 덴노지 주재소로 배속된 다미오는 점점 자신의 내면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이웃들과 왕래하며 인간적인 감정을 되찾아가고 그동안 소홀하던 가족간의 관계도 회복되어간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문스런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싶었던 다미오는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어느 날 덴노지 탑 화재사건을 촬영한 사진을 목격한 다미오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정신적인 혼란에 빠진다. 그 날 오후 인질로 붙잡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바쳐 죽은 다미오의 마지막 모습은 독자에게 의문을 제공한다. 과연 그의 죽음은 시민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에 대한 자책에서 비롯된 죽음일까 하고 말이다.
세이지의 손자인 가즈야가 경찰관이 될 무렵, 일본은 급속도의 경제 성장으로 호황을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경제호황을 틈탄 조직 폭력단들은 부동산이나 건축 등의 분야에 부패한 법조계 인물들을 포섭하여 범죄를 벌인다. 세이지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생계형이나 강탈형 식의 범죄가 주를 이루었다면 가즈야가 경찰이 될 무렵에는 보다 규모가 크고 피해가 극심한 경제형 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규모가 큰 경제형 범죄들을 다루다 보니 경찰관들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을 다루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된다. 가즈야는 아버지 다미오처럼 스파이같은 업무를 맡게 되는데, 다미오가 대학 내부의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가즈야는 경찰 내부의 인사인 한 남자를 조사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수사 4과의 가가야라는 남자는 계장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권한과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경찰관이다. 그는 다른 범죄자들이 운영하는 경마장이나 도박장들을 왕래하며 그들과 인맥을 다진 뒤 자신이 색출하고자 하는 인물에 관해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인물이다. 수많은 돈이 오가는 현장 속에서 공무원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가가야는 그들 못지 않게 화려한 옷차림과 외제 자동차를 끌어가며 생활한다. 경찰 경무부의 명령으로 그를 후원하는 세력을 알아내고자 그의 부하로 잠입한 가즈야는 그와 함께 행동하면서 선과 악의 경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가가야의 모습을 지켜본다. 가가야는 자신만의 수사방식을 통해 화려한 공적을 올렸지만 그만큼의 성과를 계속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초조한 태도를 보인다. 결국 그는 성과를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 그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타락하고 만다. 가즈야는 그의 화려한 성공과 비참한 좌절을 목격하면서 그를 타산지석으로 삼게 된다.
가가야로부터 아버지에 관한 의문의 말을 들은 가즈야는 아버지처럼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만난 후 다미오가 본 마지막 사진을 목격한다. 그 사진에서 할아버지 세이지의 동기생이었던 하야세 유조를 목격한 가즈야는 죽어가는 그를 찾아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하야세는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지만 그의 행동이 공안 업무를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을 역설하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가즈야는 그의 아버지인 다미오가 죽은 날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죽음이 단순한 순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하아세는 다미오가 대학 시절 좌익에 빠진 후배의 연인과 동침하여 자식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자를 죽인 범인을 알면서도 이를 묵과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너의 아버지 역시 자신과 같은 타락한 인간이라고 고발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죄를 폭로한다고 해서 하야세의 죄가 묵과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야세의 폭로는 오히려 가즈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 다미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가즈야가 그동안 수색한 범죄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현장을 급습하는 순간은 경찰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한 경찰관의 긍지가 담겨 있다. 흑과 백의 경계가 아닌 세상으로부터의 지지에 따르는 업무를 따라야한다고 말하는 가즈야의 말은 깊이 새겨볼 만하다. 가즈야의 대사는 얼핏 생각하면 불법 수사도 옹호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보다 깊게 생각한다면 결국 경찰의 업무는 법의 규정에 따르는 차원을 넘어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야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세이지가 사용하던 낡은 호루라기를 불며 현장을 향해 나아가는 가즈야의 마지막 모습은 경찰관의 기백이 느껴지는 감동을 준다. 비록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고 경찰관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세 경찰관의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