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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클래스> 외면하거나 혹은 인정하거나


<더 클래스> 외면하거나 혹은 인정하거나


France; 2008; 128min; Drama; Color
Director: Laurent Cantet
Cast: Francois Begaud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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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캉테의 네 번째 장편이자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더 클래스 Entre les murs>는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인물들의 클로즈업으로 채워져 있다.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교무실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있는 교실에서도 카메라는 전체가 아닌 말을 하거나 듣고 있는 누군가의 표정을 집요하리라만큼 놓치지 않는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시선의 자유로운 이동을 애초에 포기해야 한다. 오로지 인물의 얼굴에 집중할 뿐이다. 더구나 간혹 달아날 기회 조차 로랑 캉테는 "쉼 없는 대화"로 철저하게 봉쇄시킨다. 화면에서 "말"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화면을 인물과 대화로 꽉 채워넣음으로써 관객을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의 문제에 철저하게 가둬놓는 것이다. 관객이 한 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운동장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학교 건물 사이의 공터 뿐이다. 쉬는 시간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만 감독은 클로즈업이 아닌 한 발 물러서 카메라를 위치시킨다. 또한 이 공간에는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음만 있을 뿐 뚜렷한 대화도 들리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곧 관객에게 동등하게 허락된 "쉬는 시간"이다.

이렇듯 감독은 관객이 영화의 스토리에 몰입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보다 인물의 표정과 그들이 내뱉는 말을 짜증스러울만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감정이입이 아닌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 비전문 배우의 기용, 단조로운 카메라 워크 등은 영상 매체의 가공 흔적을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마치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프랑스 한 학교의 교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를 형식적으로 완성시킨다. 관객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자리를 박차고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벌어진 문제를 외면하거나, 아니면 2008년 프랑스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를 현실적인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로랑 캉테의 이런 형식은 데뷔작인 <인력자원부 Human Resourses, 1999>에서 부터 두드러졌다. 프랑스의 한 소도시 공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경영진과 노조, 노동자의 이해관계" 더불어 그 속에 얽힌 "블루칼라 아버지와 화이트칼라 아들의 미시사"를 감독은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보여주기에 주력한다.(<더 클래스>는 <인력자원부>보다도 훨씬 건조한다.) 로랑 캉테에게 있어 이러한 영화적 형식은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사용하면서 내용의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붙은 "프랑스의 켄 로치"라는 별명은 어울리면서도 꽉 채워지지는 않는 무언가를 남긴다. 두 감독 마찬가지로 현실 참여적 성격이 강한 영화를 만들지만, 로랑 캉테의 영화에서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내내 감지되는 강한 문학적 감수성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로랑 캉테는 켄 로치에 비해 훨씬 건조한 영화적 형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랑 캉테가 이런 식으로 관객을 괴롭히는 형식을 추구하면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더 클래스>의 주 공간이 되는 학교는 우리로 치면 일종의 대안학교 쯤으로 여겨진다. 정규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힘든 아이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섞여 있는 교실은 마치 현재 프랑스의 상황을 환유하는 듯 하다. 이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작게는 프랑스, 크게는 유럽 전체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인 모순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통합을 거쳐 정치적 단일체로 나아가려고 하는 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유럽 헌법을 통과시키고, 관세의 장벽을 허물고, 화폐를 통합하는 등의 테크니컬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의 기저에 깔린 편견과 고정관념을 허무는 일이다. 노동력을 위해 동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통해 유입된 다양한 인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들, 그들을 바라보는 프랑스 인들의 멸시에 가득찬 시선, 사회 안전망이 미치지 못하는 하층부를 채우며 유럽사회에 부적응한 이들이 야기하는 갖가지 사회 문제들은 "교실 속 아이들과 선생님의 관계"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단지 "축구" 문제로 감정에 불이 붙는 아이들처럼 통합은 제도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람 사이의 경계를 성공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봉합하는 일이다. 자신의 신체적, 생래적 고향을 떠나 새롭게 유럽에 뿌리 내린 이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의 몫을 넘어 전체가 공유해야 할 문제이다. 자신은 프랑스에 살고 있으니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아이와 아프리카의 국가팀을 응원하는 아이의 말다툼은 다민족, 다인종, 다국적의 사회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개개인에게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에서 최근 몇 년 간 벌어진 소요사태나 유럽 국가 사이에서의 이슬람과의 갈등, 그리고 곳곳에서 감지되는 파시스트적 움직임은 결국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건강한 통합이 요원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사례일 것이다. 외면한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로랑 캉테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결국 모두의 미래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통합을 부르짖고 있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곪고 있는, 치료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몸 전체로 퍼질 상처였을 것이다.

선생님들을 대하는 아이들의 비뚤어진 태도도 어찌 보면 그 동안 그들이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고, 여학생에게 내뱉는 선생님의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자신의 위치에서 한계에 부딪힌 표현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 프랑스인 선생님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이민자 아이들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뭉치고 서로에게 반목한다. 모두의 입장을 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또 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의 문제는 아니다. 서로를 극으로 소비시키고 있는 현실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하나 하나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감독이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한 학생의 말이 어느 때보다 선생님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 것에서 이 질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이 영화의 마지막 묵직하게 다가온다.


결코 남의 얘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국내외의 공식 문건을 예로 들지 않아도 더 이상 이 공간은 우리만의 공간이 아니다. 도시의 이주노동자들, 농촌의 이주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2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점점 드러나고 있다. 문제가 없다는 우를 범하기 보다 건강한 방법을 그들과 함께 모색하는 것이 그토록 국가발전을 외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