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동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잔돈을 지불할 때 가끔 쓰이는 동전이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감옥과 같은 난민 수용소에서 2년동안 두려움에 떨면서 생존을 추구하고 그 곳을 나온다고 해도 평생 범죄자처럼 경찰을 피해다녀야 한다면 어떨까. 주머니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는 동전이 차라리 인간보다 자유로울지 모른다. 소설 '리틀 비'의 주인공인 리틀 비는 바로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에 체류를 기도하던 난민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마치 나이지리아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듯이 리틀 비의 내면 속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동전처럼 어디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어디서 붙잡힐 경우 자살을 먼저 생각하는 소녀인 리틀 비의 내면은 흥미로우면서도 그녀의 삶에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킨다. 리틀 비가 가까스로 난민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그녀가 합법적인 신분이 아닌 불법 체류자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공포는 목을 멘 한 여인의 죽음으로 드러낸다. 언제 자신을 구속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죽음이란 끔찍한 선택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일부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영국 경찰에게 붙잡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숨을 끊을 만큼 두려운 것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고국을 떠난 계기가 단지 보다 많은 월급이 아닌 정말로 목숨의 위협 때문이었다면 어떨까. 당신은 그들의 삶을 비난할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들은 그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않는 이상 리틀 비같은 난민들의 공포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새라라는 여인의 내면을 리틀 비의 내면과 함께 교차적으로 서술하면서 2년 전 나이지리아에서 있었던 커다란 상처를 서서히 드러낸다.
새라는 한 때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여성이었다. 사회적인 악을 고발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기자된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댓가로 직장을 잃을 정도로 완고한 성격을 가진 앤드루에게 매료되고 그의 아내로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라는 사회적인 부조리에 대한 저항보다는 보다 낙천적인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글을 추구한다. 자신과 달리 세상을 암울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기사를 쓰는 앤드루는 새라의 변화를 냉렬하게 비판하며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자신을 괴롭히고 얽매이는 아내로서의 삶에 지친 그녀는 내무부 직원인 로렌스와의 불륜을 통해 일상에서의 도피를 추구한다.
불륜을 눈치챈 앤드루와의 갈등을 벗어나기 위해 새라는 여행을 통해 갈라져가는 부부 생활을 봉합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타국에서 휴가를 즐김으로써 현실의 무거움을 벗어날지 모른다는 새라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던 앤드루와 새라는 그들 앞에 나타난 두 소녀로 인해 커다란 시험에 들게 된다. 반군을 피해 도망쳐온 나이지리아의 두 소녀가 구원을 요청하자 그들을 죽이려 하는 반군은 소녀들을 살리는 댓가로 손가락을 자를 것을 요구한다. 앤드루와 새라는 반군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해오는 순간 그 곳에 일어난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 체험하게 된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라는 것은 말로는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조그만 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잘라가며 스스로를 희생하던 붓다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희생이란 건 신체의 일부분을 덜어내는 만큼 커다란 각오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앤드루는 그 순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손가락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고, 새라는 그런 남편의 행동에 반대하듯이 손가락을 희생하고 만다.
반군들이 끌고간 두 소녀는 앤드루와 새라의 시선에서 사라져 버리고, 두 남녀는 허겁지겁 영국으로 돌아온 뒤 그 일을 잊기 위해 현실에 파묻히는 길을 선택한다. 결국 짧은 나이지리아 여행은 두 남녀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로 자리잡게 된다. 어린 두 여자 아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그 순간 소녀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분을 희생하라는 요구에 대응하지 못한 체 그들을 외면한 앤드루는 생기를 잃은 우울한 인간으로 변모된다. 새라 역시 그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 체 현실 속에서 우울한 삶을 살아간다. 우울한 표정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앤드루 옆에서 착한 아내 노릇을 하고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체 배트맨이라는 환상에 갇혀있는 찰리를 뒤치닥거리하며 인생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커다란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남편인 앤드루가 의문의 전화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것이다. 남편의 장례식을 앞둔 날 집을 찾아온 리틀 비를 본 새라는 마치 유령에 홀린 듯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 날 이후 소녀들은 반군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리틀 비가 영국에 오게된 경과를 듣게 된 새라는 리틀 비를 과거에 있던 기억의 환영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인다. 나이지리아 해변에서 겪었던 끔찍한 공포 속에서 어린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새라는 그녀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비단 앤드루와 새라만이 아니다. 리틀 비 역시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던 순간을 외면한 아픈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앤드루가 죽음을 선택하려는 순간 리틀 비는 사실 그 순간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를 살리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지만 불법체류자로 잡혀가 나이지리아로 다시 돌려보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결국 그녀로 이기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결국 앤드루와 새라, 그리고 리틀 비 역시 자신을 억누르는 현실의 공포 속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힘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새라를 돕고 싶다고 부탁하는 리틀 비의 애원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새라의 모습은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선한 기질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한편 작가는 새라의 연인인 로렌스를 통해 현실 속에서 변화를 위해 힘쓰는 것에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성을 묘사한다. 새라가 리틀 비를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반대하는 로렌스 역시 새라처럼 정부의 구성원으로 일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관료제의 타성에 젖어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리틀 비가 새라의 집에 머무르는 현실을 못마땅해 한다. 어린 아이인 찰리 역시 그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트맨 복장에 자아를 숨긴 체 환상 속에서 자신의 어두움을 벗어나려는 소년의 모습은 현실의 거대한 어두움과 부조리를 마주하지 않은 체 자신을 숨기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물을 삼켰다. "타협? 성숙해진다는 것 참 슬프지 않아? 다들 찰리처럼 시작해. 악당을 모두 죽이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출발하는 거야. 그러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게되면, 아마 리틀 비 나이쯤 될까, 세상의 악의 일부가 자신의 안에 있다는 것, 자신이 악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좀 더 편안해지고 자신 안에서 발견한 악이 정말 악한 건지 자문하기 시작해. 그러면서 10퍼센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거야."
"아마 그게 인간으로 성장하는 걸 거야, 새라."
나는 한숨을 쉬었고 리틀 비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게 세상이 성장하는 거겠지." (p335)
소설의 후반부는 새라의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나이지리아로 강제 출국당하는 리틀 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는 그녀의 여정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다. 나이지리아의 해변에서 그들을 외면하던 서방인들은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녀를 위해 희생을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새라는 자신의 아들인 찰리와 함께 리틀 비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비록 새라는 리틀 비를 영국인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야기 수집이다. 해변에서 끌려나가는 소녀를 두고 온 체 그들을 잊으려 했던 새라는 이제 리틀 비를 구명하기 위해 직접 나이지리아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리틀 비처럼 전쟁으로 생명을 위협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려는 새라의 노력은 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약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작가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문제는 말이야. 네 이야기밖에 모른다는 거야. 이야기가 하나뿐이라면 넌 약해질 수 밖에 없어. 하지만 수백 개의 이야기를 모으게 되면 넌 강해지는 거야. 네가 살던 마을에 일어났던 일이 수백 개의 마을에도 벌어진 일이라는 걸 보여줄 수만 있다면 우리한테 힘이 생기는 거야. 너와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야만 해. (중략) 그게 바로 앤드루가 자기 책으로 하고 싶어 했던 일인 것 같아. 그게 바로 너 같은 처지의 여자아이들을 구하는 앤드루의 방법이었던 거지." (p393)
하지만 새라의 취재를 주시하던 군인들은 숨어있는 리틀 비를 체포하기 위해 그녀를 위협한다. 총알이 스쳐 지나가고 찰리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는 군인들의 모습을 지켜본 리틀 비는 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어 스스로를 희생한다. 리틀 비 역시 희생을 통해 앤드루를 구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를 속죄한 것이다. 나이지리아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리틀 비의 마지막 모습은 커다란 비극이지만 작가는 리틀 비가 끌려가는 순간 보여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인종들이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배트맨 복장으로 자신에게 닥친 현실 속에서 숨어지내던 찰리는 리틀 비의 도움을 통해 배트맨 복장을 벗어던지고 가상 속의 고담 시티 대신 눈 앞에 보여진 나이지리아를 받아들인다. 나이지리아의 아이들과 함께 노는 찰리의 마지막 모습은 앞으로 이어질 어린 세대들이 국가라는 경계 속에서 서로를 얽매이지 않고 함께 어울려지내는 이상적인 미래를 바라는 작가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웃으면서 찰리가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고 행복에 겨운 듯 팔을 프로펠러처럼 휘휘 돌리면서 아이들과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모두 바위 끝 세상 속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반짝이는 물보라 속에서 함께 놀기 시작하자 나는 기쁨에 겨워 울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름답다는 말, 그것은 고향 친구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당신들에게도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 우리는 모두 한 언어로 말하고 있으니까. (p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