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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에브리맨 (Everyman)


소설은 무덤 속에 묻히게 된 한 남자의 장례식에서 시작된다. 남자의 관을 둘러싼 지인들의 회상을 통해 작가는 그의 일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광고 디렉터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으며 은퇴 후에는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는 남자의 일생은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 전처에게서 낳은 두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보면 남자의 일생은 자신만의 인생을 즐기며 살아온 이기적인 면도 보인다. 과연 그의 일생은 어땠을까. 그의 형의 회고처럼 영민하고 똑똑했던 남자였을까, 아니면 그의 두 아들이 느끼는 증오처럼 남자는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 남의 고통은 생각하지도 않은 이기적인 남자였을까.

흥미롭게도 작가는 그의 일생에서 종종 있었던 수술의 과정 속에서 '그'가 자신의 일생에 대해 회고하는 방식으로 그의 삶을 묘사한다. 어린 시절 탈장으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고 노년의 마지막 순간 수술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인생에서 겪었던 몇 번의 수술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릴 적 자신의 옆에 누워있던 한 소년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부터 남자는 죽음이란 운명 근처에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병원을 들락거렸던 셈이다.

노년에 몇 번의 죽음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남자는 노년의 삶이 얼마나 잔인하고 괴로운 것인지 깨닫는다. 아내와 평생토록 살아오면서 자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보통 노인들과 달리 남자는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피비에게서 얻은 딸인 낸시만이 그나마 남자에게 위안이 되어주지만 그녀 역시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남자는 낸시를 도와주려고, 아니 사실은 그녀와 함께 있음으로써 외로움을 걷어내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노력은 피비의 뇌졸증으로 물거품이 된다. 피비에 대한 죄책감이 있던 남자는 차마 자신의 딸에게 함께 살자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자신과 달리 병치레 없이 자식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형에 대한 질투가 생긴 남자는 그와 연락도 끊은 체 홀로 살아간다. 결국 남자는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기심으로 그 행복을 산산조각낸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더라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나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p162)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 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라고 딸을 위로하던 그의 말처럼 남자는 홀로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노년의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그의 부모가 묻힌 무덤을 찾아가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고 그가 묻힐지도 모르는 묘지를 담당하는 한 남자와 이야기하며 마지막 순간의 감정을 홀로 받아들이는 남자의 마지막 모습을 읽으면서 그 역시 '에브리맨(보통 사람)'처럼 사람들에게서 삶의 위안을 느끼고 싶었구나 하는 탄식과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이 느껴졌다.  

'에브리맨'을 읽었을 때 얇은 책 두께만 보고 쉽게 읽을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쉽게 덮지 못할 정도로 깊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노년의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쓸쓸함을 이렇게 냉철하고도 잔인할 정도로 묘사한 작가의 필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난 후 앞으로 찾아올 노년의 두려움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나 자신 주변의 사람들의 교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도 깨닫게 해준 좋은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