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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의형제> 왜 강동원은 간첩이어야 했을까?

영화를 보고나서 만감이 교차한다.

요약하면, 구조와 이야기 플롯의 연결, 인물의 개성 살리기, 갈등과 관계의 소통 화해까지 매끄럽게 잘 그린 영화다. 자칫 진부해지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세련되게 잘 그렸다. 송강호, 강동원이라는 매력적인 배우의 개성과 연기도 잘 살렸다.

 

왜, 심경은 복잡해지는가?

간첩과 국정원요원이라는 두 인물의 설정에서 걸렸다.

장훈 감독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인터뷰에서 내뱉는 멘트에도 전작 <영화는 영화다>를 떠올리게 하는 세련된 인터뷰다. 일면 그렇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왜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라는 철학으로 만든 영화를 두고, <태극기 휘날리며>, <간첩 리철진>, <쉬리>, <JSA공동경비구역> 같은 영화를 되새김질하며 <의형제>를 보느냐 항의하지 말길 바란다.

영화는 예술이지만 동시에 인식의 기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의형제>엄존하는 남과 북의 사회가 영화에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훈 감독은 싸구려 반공영화의 시각에 두 인물을 놓지는 않았다. 갈등의 주된 선도 남북관계라는 정치적인 메타포를 중심으로 풀어가지는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편견과 오해, 대립을 따라 움직인다. 그럼에도 두 인물의 그림자에는 남과 북 사회의 이미지를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실체 없는 북, 간첩 _ 외계인의 침입

문제는 북의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왜곡된 모습이든, 객관의 현실이든 북은 없다. 다만 설정만 있을 뿐이다. 설정으로 그치고 설정이었을 뿐이라고 이야기 하는 <의형제>가 서글퍼지는 대목이다.

남의 나라 자본 골드만삭스가 2014년 통일한국을 상정하고 성장세를 가늠하고 투자를 타진하는 오늘에 투영된 북은 미지의 세계다. 간첩으로 설정된 강동원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상륙했지만, 우주선이 난파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외계인과 다를 바 없다.

감독은 북이라는 우주 행성의 환경이나 강동원이라는 표류 외계인의 정체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으로 영화를 몰고간다. 부질없는 갈등 구조 속에서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은 남과 북이라는 화해할 수 없는 이질성이다. 이질감을 도드라질데로 도드라지게 해놓고, "설정은 설정으로 용도 폐기 됐으므로, 나는 내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선언하듯 영화를 맺는다.
참으로 씁쓸하다.
전작 <영화는 영화다>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부질없는 설정상의 자기 역할에 몰두하여 피칠갑을 하고 진탕을 구르듯이 <의형제>의 송강호와 강동원도 그들만의 가상현실 속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관객에게는 두 사람이 입고 있던 캐릭터 의상은 잊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지만, 영화는 영화로 말한다.

표류하는 ET여도 관계 없고, 사회에 적응 못하는 사이코패스여도 관계없고, 비행청소년이어도 관계없을 인물을 굳이 간첩이라는 캐릭터로 만들어내는 과정에 <의형제>의 불편함이 시작된다. 현실을 비추든, 현실을 딛고 점프한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드러내든지 영화는 삶을 이야기 한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북 사회, 그 제한된 환경에서 남북문제를 다루는 무수한 작품들이 많은데 그것들은 다 두고 왜 하필 장훈 감독에게만 딴지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되묻고 싶다. 왜 굳이 다른 설정으로도 풀 수 있는 이야기를 간첩과 국정원 요원이라는 설정을 빌어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고.

영화는 영화고 설정은 설정이지만, 남북 문제는 영화를 보는 사람도 영화를 안 보는 사람도 지혜를 다해야 할 현재 진행형의 문제며, 삐끗하는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물리적인 충돌을 빚을 수 있는 휴전 당사자간의 문제며,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하는 토대가 될 수도 있는 현실세계의 비중있는 문제다.

이야기를 풀기 위해 튕겨 놓는 설정으로는 참신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영화를 보고 나면 남는 것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불안한 그림자다. 멋진 배우들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기엔 <의형제>는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