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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위핏] 소녀는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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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핏 (Whip It)
드류 베리모어 감독, 2009년

변화와 안정, 그 속에 담긴 전복적인 통쾌함

소녀는 남들과 달랐다. 엄마의 등살에 떠밀려 참가한 미인대회에서는 머리를 새파랗게 물들이고 무대 위에 올라가 사람들을 놀랬다. 게다가 할아버지, 혹은 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훌륭한 비행사일 뿐 아니라, 역사에 남을 훌륭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며 남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소녀. 하지만 엄마는 미인대회만이 출세할 길이라며 소녀의 이야기에는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롤러 더비라는 스포츠가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여성들이 펼치는 거칠지만 스릴 넘치는 경기에 소녀는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스케이트를 타고 태어난 것은 아니야.” 그 말에 소녀는 용기를 냈다. 그렇게 소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초로 무언가를 스스로 선택했다. 어른이 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롤러 더비 경기에 뛰어든 17살 소녀 블리스(엘렌 페이지)의 이야기를 그린 <위핏>은 스포츠영화라는 틀 안에서 성장영화와 여성영화로 미덕을 고루 담아낸 영화다. 연기자에서 연출자로 처음 변신을 시도한 드류 베리모어 감독은 롤러 더비 경기가 지닌 속도감과 통쾌함 속에 10대들이 겪을 고민을 적절히 담아내는 안정적인 연출을 선보인다. 여기에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하며 여성감독으로서의 정체성도 드러내 보인다.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에서도 재능 있음을 증명하는, 말 그대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작이다.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만큼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성장영화로서의 면모들이다. 사실 <위핏>은 부모와의 갈등이 중심에 있는 만큼 성장영화로서는 비교적 전형적인 편이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선택함으로써 성장한다는 주제는 여타 성장영화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위핏>이 전하고자 하는 성장영화로서의 주제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변화와 안정, 곧 진보와 보수로 이어지는 두 가치의 대립 속에서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텍사스의 작은 마을 보딘이 지닌 특유의 정서, 그리고 음악을 통한 인물들의 문화적 취향과 대사, 행동에서 드러나는 가치관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에 영화가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왜 블리스가 변화를 원하는지, 미인대회 대신 롤러 더비에 매혹되는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워커를 신고 펑크 록을 부르는 블리스와 고전적인 가치를 중요시 하는 마을 보딘은 애초부터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다. 그렇기에 블리스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는 비단 블리스만의 문제가 아님을, 사실은 부모 세대들도 똑같이 겪었던 문제임을 영화는 블리스의 엄마를 통해 넌지시 암시한다. 한때 블리스처럼 미인대회에 출전해 1등의 영예를 누렸던 엄마는 블리스 앞에서 한없이 엄격한 태도를 보이지만, 딸 몰래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서 한때 블리스처럼 변화를 꿈꿨음을 엿볼 수 있다. 블리스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크리스찬 록 밴드 ‘스트라이퍼’의 티셔츠 또한 10대 시절 엄마의 ‘일탈’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소품이다. 영화 속 엄마와 딸의 갈등이 비교적 생각보다 쉽게 화해로 이어지는 것은 그래서다. 이미 그녀들에게는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와 딸의 유대감은 성장영화 뿐만 아니라 여성영화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인대회’와 강한 여성을 강조하는 ‘롤러 더비’의 대비 속에서 롤러 더비의 편을 들어주는 <위핏>에서는 기존 여성에 대한 전복적인 가치관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위핏>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보다는 온몸에 문신을 하고 롤러 더비 경기를 하며 맞고 터지고 코피가 나도 웃을 수 있는 여성이 더 아름답지 않느냐고 넌지시 묻는다. 드류 베리모어를 비롯해 줄리엣 루이스, 스턴트 배우 출신으로 <데쓰 프루프>에 출연했던 조이 벨, 여성 힙합 뮤지션 이브 등 롤러 더비 선수로 캐스팅된 배우들의 매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역배우 시절 <이티>를 통해 주목 받은 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10대 후반과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들며 성숙한 배우로 자리 잡은 드류 베리모어의 인생사를 생각해보면 <위핏>은 진정 드류 베리모어다운 연출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롤러 더비를 통해 소녀는 많은 것을 얻는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이겨내고 온몸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남들이 뭐라 하던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는 롤러 더비 동료들에게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당당함을, 자신을 끝내 믿어준 부모님과 친구로부터 무엇이든지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믿음이 가지 않는 남자친구는 거침없이 차버릴 정도로 성숙해진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돼간다. 롤러 더비 마지막 경기에서 소녀가 속한 팀은 원했던 꿈을 이루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해 울지 않는다. 그 순간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 더욱 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소녀는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소녀는 울지 않을 것이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