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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밀크] 평범하기에 꿈꿀 수 있었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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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 (Milk)

구스 반 산트 감독, 2008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놀라운 걸작

변화와 안정.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이 둘은 길고 긴 인생에서 여러 번 부딪히게 되는 갈림길 중 하나다. 치기 어린 패기에 사로잡힌 청춘 시절에는 대부분 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한없이 불타오를 것 같던 불꽃도 언젠가는 사그라지듯, 열정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살던 사람들도 서서히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직 나이가 어린 이들을 바라보며 그런 치기 어린 패기는 그저 청춘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짐짓 어른스런 태도로 추억을 회상하듯 말하곤 한다. 세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바꾸기 보다는, 세상의 이치대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 마흔 살이 지나서 갑자기 변화를 꿈꾼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하비 밀크.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하비 밀크는 그곳에서 동성애자의 인권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다. 두 번의 시의원 선거와 한 번의 주의원 선거 출마에 낙선했음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끝내 미국 최초의 게이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제한하려는 조약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장애인과 이민자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비 밀크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8년을 바친다.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하비 밀크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 것인가?


하비 밀크의 마지막 8년을 영화에 담은 <밀크>는 그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 <밀크>는 하비 밀크를 영웅적인 존재, 혹은 위대한 존재로 묘사하는데 관심이 없다. 대신 하비 밀크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영화의 시작부터 강조한다. “나는 변화가 필요해. 마흔 살이 됐지만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어.” 마흔 살 생일이 되던 날, 평범한 일상에 싫증을 느낀 하비 밀크는 그렇게 샌프란시스코로 훌쩍 떠난다. 이 평범한 시작이야말로 <밀크>가 여타 정치인들의 생애를 다룬 영화들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구역에 도착한 하비 밀크가 동성애자를 향한 사회의 차별적인 태도를 몸소 체험하며 동성애자 인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쳐가는 과정을 <밀크>는 최대한 거짓 없이 솔직하게 담아낸다. 아카데미 각본상에 빛나는 더스틴 랜스 블랙의 각본은 <밀크>의 영화적 완성도를 지탱하는 첫 번째 보증수표다. 하비 밀크와 함께 선거에 뛰어들었던 지인들을 오랜 시간 취재하며 완성된 시나리오를 통해 <밀크>는 하비 밀크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동성애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1970년대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선거에 뛰어든 하비 밀크의 반복되는 실패와 성공의 과정을 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담아낸 영화는 정치인 하비 밀크가 아닌 한 남자의 ‘연인’이었던 하비 밀크의 모습을 담는데도 소홀하지 않는다. 정치에서는 모든 이의 희망이었을지언정, 사랑에 있어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기에 언제나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하비 밀크의 인간적인 모습은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관객들에게도 공감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물론, 영화 속 하비 밀크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를 연기한 배우 숀 펜의 연기력 때문임을 간과할 수 없다. 더스틴 랜스 블랙의 시나리오는 숀 펜을 통해 한층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숨 쉴 수 있다. <밀크>를 보는 내내 숀 펜의 연기에 놀라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성애자인 그가 동성애자인 하비 밀크를 연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포스터만 보고 영화를 통해 숀 펜을 만날 거라는 생각으로 극장을 들어섰다면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 편이 낫다. 영화를 보는 128분의 시간 동안 우리가 스크린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배우 숀 펜이 아닌, 정치인 하비 밀크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듯 숀 펜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흉내 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최대한 사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하비 밀크를 스크린에 담아내고자 한다. 작은 몸짓과 사소한 대사까지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숀 펜의 연기는 왜 그가 지난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됐는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훌륭한 배우의 명연기,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 <밀크>의 놀라운 완성도가 입증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노련한 연출 때문이다. <밀크>를 보는 동안 여러 번 놀라게 된다. 동성애에 개방적인 미국에서도 이렇게 사회적인 갈등과 사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이를 제법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만들어낸 각본에 놀라게 되고, 숀 펜의 훌륭한 연기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밀크>에서 구스 반 산트의 전작들, 특히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로 이어진 ‘죽음 3부작’의 흔적들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이들 작품에서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시적인 영상 실험에 몰두했던 구스 반 산트는 <밀크>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상업영화와의 만남을 시도한다. 물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다. <밀크>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 하비 밀크의 모습을 16mm로 담은, 거친 입자가 오히려 아련하게 느껴지는 신을 비롯해 길거리에 덩그러니 놓인 호루라기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동성애자를 향한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가슴 아프게 담아내는 숏, 독특한 앵글에 담긴 갖가지 이미지들이 스토리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녹아들고 있다. 그 하이라이트는 바로 하비 밀크가 죽음을 맞이하는 신이다. 하비 밀크의 암살을 결심한 댄 화이트가 처연한 표정으로 시청 복도를 걸어가는 순간, 가슴 서늘했던 <엘리펀트>의 이미지들이 오버랩 되는 것은 단지 우연은 아니다. 적어도 죽음이라는 순간을 정적으로 담아내며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의 동요를 느끼게 한다는 점만큼은 구스 반 산트의 예술적인 실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년을 살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하비 밀크는 자신의 마지막 8년을 그토록 뜨겁고 열정적으로 살면서 그 누구보다 더 큰 삶의 의미를 간직한 채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8년이라는 세월동안 하비 밀크가 그토록 원했던 희망의 메시지는 그의 죽음 뒤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았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하비 밀크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다.

“희망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다면 삶의 가치 또한 없는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하비 밀크의 한 마디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차별과 부조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비 밀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밀크>는 깊은 감동과 함께 질문 하나를 남기며 막을 내린다. 평범한 하비 밀크처럼 평범한 당신도 변화를 꿈꿀 수 있지 않겠냐고.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