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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예언자] 범죄의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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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Un prophète)

자크 오디아르 감독, 2009년

사실적인 연출과 장르적인 쾌감의 독특한 조화

사람들은 교도소를 범죄자를 교화시키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프랑스에서 온 영화 <예언자>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때로는 교도소가 평범한 사람을 진정한 범죄자로 재탄생시킨다는 사실을, <예언자>는 6년형을 받고 처음으로 교도소에 들어온 19살 청년 말리크(타하 라힘)의 삶을 빌려 이야기한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소년원을 전전하며 험한 세상을 홀로 살아온 말리크지만, 그에게도 처음 맞이한 교도소 생활은 만만치 않다. 어떻게든 낯선 교도소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 힘을 다하지만, 오히려 어수룩한 모습 때문에 같은 수감자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며 왕따 취급을 당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코르시카 갱의 리더 루치아니(닐스 아르스트럽)의 예상치 못한 손길이 다가오면서 말리크의 삶은 조금씩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154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을 지닌 <예언자>가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에 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을 알려주며 말리크를 진정한 범죄의 세계로 이끄는 루치아니,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말리크의 공부를 도와주며 형제와도 같은 친분을 쌓아가는 리야드, 새로운 사업을 소개시켜주는 조르디, 그리고 말리크의 손에 의해 죽은 뒤 계속해서 그의 앞에 나타나 잠언과도 같은 말들을 던져주고 사라지는 레예브 등 말리크는 사회와는 격리된 교도소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끄는 선배이자 선생님, 아버지, 나아가 그의 삶을 예언하는 선지자를 만나며 진정한 범죄의 세계에 편입되기 시작한다. 어수룩한 모습으로 왕따를 당하던 말리크는 이들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며 조금씩 교도소 안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예언자>는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은 교도소의 모습을 통해 범죄의 재탄생을 담담하면서도 묵묵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범죄 느와르라는 장르적 외피를 둘러쓰고 있으면서도 사실적인 필치를 유지하는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개성 넘치는 연출력이다. 범죄영화임에도 핸드헬드를 주로 사용해 인물을 좇으며 담아낸 화면에서 풍기는 사실적이면서도 건조한 분위기는 <예언자>를 더욱 긴장감 넘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곳곳에 장르적인 쾌감이 느껴지는 신들을 삽입하며 할리우드영화와는 또 다른 극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초반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말리크의 레예브 살인 신의 그 가슴 서늘한 공포, 루치아니의 든든한 지원 아래 교도소 안에서 자신의 힘을 키워가는 말리크의 모습을 힙합 음악과 함께 리드미컬하게 편집한 속도감,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총격 신의 긴장감 등 <예언자>는 예상 밖의 스타일리시한 장면들로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사실적인 연출에 방심하고 있던 관객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이 상반된 연출이 빚어내는 충돌이 남기는 깊은 잔상은 <예언자>가 왜 놀라운 영화인지 느끼게 만든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적인 연출 태도로 인해 인물과 사건의 묘사에 대한 영화의 불친절한 태도는 <예언자>를 산만하게 만드는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인물들 사이의 관계의 핵심과도 같은 교도소 내 아랍인과 코르시카계 민족 사이의 갈등, 그리고 이를 통해 이방인을 향한 유럽 사회의 적대적인 태도를 이야기하려는 연출자의 의도 역시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154분의 러닝타임 동안 힘을 잃지 않는 <예언자>의 놀라운 연출은 왜 이 영화에 칸영화제가 심사위원 대상을 준 것인지를 확신하게 만든다. 아직은 낯선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 달랑 들고 교도소에 입소한 말리크는 교도소에서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범죄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법칙을 완벽하게 터득한 말리크는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예정보다 빨리 형량을 마치고 교도소를 벗어난다. 처음 들고 온 초라할 대로 초라해진 지폐를 말리크는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그 지폐를 보며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교도소를 들어올 때는 그 작은 지폐 한 장마저도 버릴 수 없었던 말리크는 이제 범죄자의 거물로 다시 태어나 세상 밖으로 나선다. 범죄는 그렇게 재탄생한다는 처연한 진실을 <예언자>는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