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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_ 드디어 극장에서 본 뮤지컬 영화의 마스터피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 1961)
드디어 극장에서 본 뮤지컬 영화의 마스터피스!


영화팬으로서 갖게 되는 소원 중 하나라면, 동시대가 아닌 이전의 명작들을 비디오나 DVD등 홈비디오 매체가 아닌 극장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경험일텐데,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들 가운데 반드시 보고 싶었던 작품들 가운데는 데이빗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압도적인 시네마스코프 영상과 스크린에서만 그 감흥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 스케일 때문인 경우도 있었고, 오우삼의 <영웅본색>처럼 단순히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라 '과연 극장에서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하는 호기심과 기대 때문인 경우도 있었다. 하 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장에서 '꼭 한번' 보고 싶은 작품으로 계속 꼽아왔던 것은 바로 이 작품, 로버트 와이즈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영화라는 것은 어차피 극장 상영을 위해 만들어진 '극장 예술'이기도 하고 (특히 이전 영화들이라면), 이 작품 같은 경우는 특히 극장에서 반드시 봐야만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점들을 다 재쳐둔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냥' 꼭 한번 극장에서 보고 픈 개인적인 영화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과 <올리버>, <그리스> 등과 함께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영화인 동시에, 무엇보다 음악과 안무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압도하는 수준을 보여주는 엄청난 걸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이번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아카데미 영화제'에 이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사 백두대간에 이 필름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을 1년 반쯤 전에 알고는 주구장창 이 작품을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려왔었는데, 매번 긴 상영시간과 적절한 기획을 찾지 못하고 점차 잊혀질 때쯤,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던 이번 상영 기회는 왠지 개인적인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 작품의 오프닝 시퀀스는 언제봐도 경이스럽다. 뉴욕의 풍경을 항공촬영으로 훑어가는 샷은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도 뉴욕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영화의 주요 갈등요소가 되는 사회문제를 어렵지 않게 드러낸다. 이후에 이어지는 'Jet Song'의 임팩트는 21세기에 봐도 실로 압도적이다)

사실 우려했지만 실제 극장에서 본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는 DVD에 수록된 버전과는 달리 오프닝 타이틀 부분이 일부 삭제되었으며 (DVD버전을 보면 한곡이 온전히 끝날 때 까지 타이틀이 컬러만 변경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번 상영 필름에서는 이 부분이 금방 지나간다), 화면비 역시 상하 좌우가 모두 온전치 못한 것 같았으나(예전 극장에서 보았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자면, 좌우의 화면비가 엄청나게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아주 예전에 국내 개봉되었을 때 역시 여러가지 문제로 인터미션 등 삭제가 된 버전이 상영되었다고 한다. 이번 상영분 역시 인터미션은 추가되지 않았다).




(단 한가지 장면만으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설명해야 한다면, 도입부의 'Jet Song'을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안무라는 것이 스크린에 어떻게 녹아드는지에 대한 교과서이자 진부하지 않은 감각이 돋보이며, 음악이라는 것이 이야기와 어떻게 결합되는 지에 관한 '좋은 예' 이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작품이었기에 드디어 상영이 시작될 때의 감흥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황홀한 'Prologue'와 'Jet Song' 을 볼 땐 소름이 멈추지 않았으며, 'Maria'와 'Tonight'이 흐를 땐 감동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Jet Song'의 경우 특히 도드라지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음악은 완전히 장면과 결합되어 있다. 최근 뮤지컬 영화들을 보면 장면과 음악이 겹치는 것을 촌스럽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런 것이야 말로 진정한 뮤지컬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다.

얼마전 EBS에서 방영한 레너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를 보고 난 뒤라 이 작품의 음악과 장면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빨랐는데, 음악이 어떻게 이야기를 꾸미는지, 반대로 같은 음악에 어떤 이야기를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는 번스타인의 설명을 떠올리니, 장면과 음악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이 작품의 구성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확실히 번스타인의 음악에서는 장면이 그대로 느껴진다. 뭐랄까 번스타인의 음악은 장면을 뒷받침 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음악으로 장면을 쓰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사운드트랙을 듣고 있노라면 그 어느 뮤지컬 영화보다 영화 속 장면이 속속들이 전부 떠오르곤 한다. 이것이야 말로 뮤지컬 영화의 가장 좋은 예가 아닐까.




뮤지컬 영화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더 훌륭한 점이 있다면 단연코 '단체 연기'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장르의 영화들도 그렇지만, 뮤지컬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주연 배우들은 물론 조연 연기자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 황홀함 마저 느끼게 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몇번이고 봐도 매번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살아있는 연기에 있다. 이들의 연기는 너무 영화적이고 연극적이라 '과연 저런 연기를 최근에도 본적이 있었나' 싶기까지 할 정도인데, 완벽하게 카메라 안에서만 존재하는 캐릭터들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면서도 마치 그림같은 장면 장면은, 만약 내가 감독이어서 내 앞에서 저 연기를 실제로 보았더라면 얼마나 뿌듯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 작품은 특히 주연 한 두명이 만드는 작품이라기 보다는 제트단과 샤크단, 그리고 그들 각각의 무리가 '그룹'지어서 연기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들 구성원 하나하나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토니가 노래할 때 뒤에서 제트 단원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베르나르도와 아니타가 화면 맨 앞에 춤을 출 때 샤크단원들은 각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숨겨져 있지만 반드시 챙겨야할 이 작품의 보석같은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Maria'와 'Tonight'을 비롯해 이 작품의 주요곡들의 장면들은 너무 많이 보고 또 보아서, 노래는 물론 안무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외우고 있는데, 극장에서도 동작을 따라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느라 혼났다)

예전엔 그냥 노래가 좋고 춤이 멋져서 보았던 영화였다면, 이제와 다시 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새로운(?) 발견이라면 안무의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안무를 맡은 제롬 로빈스의 경우 발레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안무가로서 영화의 안무들은 발레 동작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갱들의 이야기와 발레 안무가 엇나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막상보고 나면 클래식한 음악과 발레 안무가 얼마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당시 한참 유행하던 고전적인 MGM뮤지컬과도 거리가 있고,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현대적인 신세대 뮤지컬로 보기에도 어려운(당시에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음악을 맡은 레너드 번스타인, 안무가이자 연출을 맡은 제롬 로빈스, 그리고 뮤지컬계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 이렇게 각각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되어 시너지를 이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야기의 기본 뼈대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단순히 '로미오와 줄리엣'을 뉴욕의 소년 갱집단의 이야기로 옮겨왔다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들이 각자를 적대하는 이유 가운데는 단순한 세력 다툼이 아닌, 당시 미국내의 사회적인 문제와 이민자 문제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손드하임이 대단한 이유는 이런 무거운 주제들을 유쾌하고 흥겨운 리듬 속에 자연스레 녹여내었다는 점이다. 사실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저 저런 가사들이 장난으로 느꼈을 정도로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이제와 다시 보니 가사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사 역시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상당히 라임을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극장에서 보면서 새삼 발견한 영화의 장점이라면 손드하임의 가사가 아닐까 싶다.





'Tonight' 시퀀스는 여러가지 다른 이야기와 캐릭터의 이야기가 하나의 노래에 녹아드는 가장 전형적인 시퀀스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구성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자주 쓰는 구성이기도 하고, 폴 토마스 앤더스인이 <매그놀리아>의 'Wise Up' 시퀀스를 통해 보여주기도 했었는데, 아마도 이 작품이 그 시초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곡에 등장하고 있는 각각의 그룹들의 비중이 동등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 영화만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단순히 로미오와 줄리엣에 근거한 남녀 로맨스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 곡의 후반부를 보면 역시나 동작과 음악이 기가 막힌 싱크로율을 보여주는데, 특히 중간에 형사와 경찰차가 나오는 장면을 껴넣은 부분의 리듬감과 긴장감은 최고다.




예전에는 어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오늘밤 결투'가 끝나고 난 뒤의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공감도 재미도 못느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투 이후 영화는 급격히 어두워지고 다운되기 때문이다. 그 중 이런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이 있다면 결투 이후 혼란스러운 제트단의 분위기를 잘 그린 'Cool'을 들 수 있겠는데, 예전 기억에 이 시퀀스는 그저 '지루한 부분' 정도 였는데 이제와 보니, 극중 시퀀스 가운데 가장 난이도 높은 안무는 물론 구성 면에서도 매우 완성도 높은 시퀀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극장 관람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라면 분명 'Cool'의 재발견을 들어야겠다.





'Cool' 과 마찬가지로 그 이후 등장하는 마리아와 아니타의 'A Boy Like That & I Have a Love' 시퀀스 역시 이번 관람의 재발견 포인트였다. 어렸을 때는 단순한 것만 보였었다면, 이번에는 마리아보다 오히려 아니타 입장에서 보게 되어, 아니타에게는 너무 가혹한 시퀀스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쩌면 토니를 너무 쉽고 급작스럽게 용서해버린(용서의 과정 조차 없었던 것 같다) 마리아가 아니타에게 너무 그 용서를 강요하는 듯 느껴졌는데, 이를 눈물 흘리며 수용할 수 밖에는 없는 아니타의 모습에 더욱 동화되었다. 이 시퀀스도 예전에 보았을 때는 그저 '지루한 후반부' 였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영화의 메시지를 더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사실 뮤지컬 영화 가운데(특히나 고전 가운데) 이렇게 어두운 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이 있었나 싶다. 뮤지컬 세상은 항상 유쾌하고 밝을 것만 같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 유쾌함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현실의 무게감을 잘 그려내고 있다.



(마리아가 입고나온 옷 색깔을 유심히 보라. 마리아는 드디어 자신이 입고 싶던 빨간 드레스를 입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감상이라 2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고 빠져들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더 완벽하고 온전한 화면비로 즐겼더라면 감흥이 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내 인생의 뮤지컬 영화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또 한번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앞으로도 허락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고, 너무나 고마운 생일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