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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허하라!

기적의 오케스트라 - 엘 시스테마
감독 파울 슈마츠니,마리아 슈토트마이어 (2008 / 스위스,독일,프랑스,일본,스웨덴)
출연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구스타보 두다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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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인플레 속에서, ‘기적’ 아닌 ‘기적’들의 홍수 속에서 본래 의미에 가장 걸맞은 형태의 ‘기적’을 일궈낸 베네수엘라 아동 및 청소년 오케스트라 육성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범죄율 높기로 악명 높은 남미에서도 위험하기로 손꼽히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아이들이 열다섯이면 마약을 하고, 총을 손에 쥐고, 석 달 뒤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는일이 비일비재한 가난과 폭력의 땅에서
1975년 경제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11명의 아이들로 시작한 엘 시스테마
35년 만에 베네수엘라 전 지역 26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만 스물여덟에 파격적으로 LA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에 선임된 구스타보 두다멜, 열일곱에 역대 최연소로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이 된 에딕슨 루이즈 등 전 세계에서 촉망 받는 신예 음악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엘 시스테마가 진정 빛나는 이유는, 그리고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이유는
단지 가난한 나라에서 소위 엘리트 코스에 진출하는 음악 천재들 몇몇을 길러냈다는 인생역전 신데렐라 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범죄의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 수십만 명에게 방과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생겼다는 것,
대물림되는 가난의 굴레, 거리의 삶 대신 더 나은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선사했다는 것이 보다 값진 성과다.
나아가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서로 협력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사회성을 익힌다.
그 하모니가 비단 음악에만 머물지는 않을 터이다. 아이들의 음악 발표회는 자연스레 이웃주민들이 어울리는 축제의 장이 된다.
음악이 아이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가족의 삶을 바꾸고,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과정을 보면, ‘엘 시스테마나라를 바꿔놓았다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영화가 엘 시스테마에 참가하는 평범한 아이들의 눈동자를 (어쩌면 지나치게 반복된다 싶을 만큼) 그토록 오래 비추고, 아이들이 들려주는 말에 그토록 귀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리도 나지 않는 종이 악기를 들고 초롱초롱 빛나는 꼬마들의 눈망울, 조잘조잘 떠들어대다가도 악기를 쥐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부지고 진지하게 변하는 아이들의 표정, 흥겹고 유쾌하게 음을 유희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 주자들의 몸짓까지,
음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상 최고의 풍경이다.

예술이 세상을 위해 무얼 할 수 있느냐는 냉소와 패배주의가 그 내부에서조차 진실로 받아들여질 때,
아브레우 박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수많은 교사와 자원봉사자 들은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치 아래 무모한 도전(그야말로 무한도전!)을 현실로 만들며 그 신념을 증명해 보였다.
범아메리카주의, 곧 ‘하나 되는 아메리카’를 향한 시몬 볼리바르의 꿈은 200년의 시간을 넘어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통해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중간중간 이음새로 삽입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합주 장면은,
엄숙주의에 굳을 대로 굳은 유럽의 클래식 오케스트라 공연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생기로 넘친다.
어깨를 들썩이고 엉덩이를 흔들며 리듬을 타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며, 관객과 연주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뛰어넘어 하나 되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
패배주의, 냉소주의, 염세주의, 비관주의 그 모든 부정적 주의들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음악의 압도적 실감이라니!
(만사에 삐딱하고 심드렁한 나조차 눈물 찍 콧물 찍 흘리면서도 엉덩이와 어깨를 달싹이며 리듬을 타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나 뭐라나. 내가 남미를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

물론 엘 시스테마에도, 다큐영화 <엘 시스테마>에도 약점은 있다.
그 안에도 엄연히 경쟁이 존재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데서 나아가 아이들은 더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기 위해 수십 번씩 오디션에 도전한다.
두다멜의 성공 스토리를 목격하면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제2의 두다멜을 꿈꾸며 인생역전을 노리지만, 아무나 두다멜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낙오하고 절망하고 실의에 빠질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런 부분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표피적 접근에 그칠 뿐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또한 <엘 시스테마>엘 시스테마 35년 역사를 망라하는 작품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 이 프로젝트를 꾸려온 과정은 변변한 자료화면 하나 없이 대부분 짤막한 인터뷰로 처리된다. 아이들의 모습과 합주 장면을 담는 데 들인 공에 비하면 조금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가 거의 프로파간다에 가깝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웬걸, <엘 시스테마>는 바로 그 프로파간다가 맞다.
이 다큐멘터리는 성찰대신 실천을 요구하며 관객을 선동’ (프로파간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상 부의 재분배니 성장과 복지의 균형이니 절차적 정의니 입씨름만 하기 바쁜 서구(그러니까 구유럽 세계) 지식사회 출신의 감독이,
음악이 우리 무기라며 행동실천으로 그 모든 이론과 현실적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버린 놀라운 기적에 바치는 경외의 시선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도 너무 많이 했다. 말도 너무 많이 했다. 그러니 이제 좀 움직이자!’는 것.
실제로 <엘 시스테마>의 국회 상영이 추진되고, 영화에 감화 받은 사람들이 한국판 엘 시스테마를 시작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물론 당장 실현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얼마나 바람직한 프로파간다인가.
끊임없이 긍정하도록 만드는 것, 왠지 나도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고무하는 것, 내가 당장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하도록 이끄는 것, 난 그게 이 무비판적 다큐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설득을 통해 정책적 지원을 이끌어내며 35년간 프로그램을 일관된 성격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아브레우 박사의 말에, 청와대에 계신 누군가가 생각나 잠시 난감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진짜 기적이 보고 싶다고? 당장 베네수엘라로 날아갈 수 없다면 가까운 극장으로 가시라.


 

l  함께 보면 좋을 다큐멘터리 영화

꿈꾸는 카메라-사창가에서 태어나(2003)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인도 콜카타 홍등가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주고 사진 찍는 방법을 알려준 뒤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l  함께 읽으면 좋을 책


희망의 인문학(
쇼리스 지음, 2006)
노숙자, 빈민, 죄수 등 최하층 빈민들에게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도와주는 클레멘트 코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