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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arthouse모모

[여덟 번의 감정] 남녀관계 심층탐구 보고서


여덟 번의 감정 (The Grass Is Greener)

성지혜 감독, 2010년

순간의 감정으로 착각하게 되는 남녀관계

성지혜 감독의 <여덟 번의 감정>은 주인공 종훈(김영호)의 독백으로 막을 연다. “제가 100%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이 석연치 않은 여운이라니! 확신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과연 100% 마음에 드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간의 감정이란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남녀관계라면 더욱 더 그렇다. <여덟 번의 감정>은 그 미묘한 감정 변화를 따라가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종훈이 마음에 들었다는 사람은 부산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은주(윤주희)다. 순백의 간호사 옷을 입고 청순한 미소로 반겨주는 은주 같은 여자에게 안 끌릴 남자가 어디 있을까. 종훈이 은주를 좋아하게 되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종의 소유욕. 그러나 연애 좀 해본 남자답게 종훈은 처음부터 그런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배려를 가장한 접근에 은주도 못 이기는 척 종훈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은밀한 밀고 당기기. 그러나 여기에는 어떠한 로맨틱한 상상력도 개입되지 않는다. <여덟 번의 감정>은 이러한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그저 냉정하게 바라볼 뿐이다.

“현재의 쾌락이 왠지 거짓이라는 느낌. 그리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쾌락이 변덕스러움의 원인이다.” 성지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인용한 파스칼의 문장은 <여덟 번의 감정>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준다. 어떠한 이유나 계기 없이 순간마다 변해가는 감정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여덟 번의 감정>의 가장 큰 목적이다. 종훈은 옛 연인 선영(황인영)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은주와의 감정을 키워가지만, 정작 결혼이라는 현실을 눈앞에 두게 되면서 서서히 감정이 식어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남녀관계를 다룬 영화의 클리셰와 같은 단조로운 스토리는 탄탄하게 구성된 스토리텔링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영화는 그러한 클리셰 속에서 드러나는 종훈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세밀한 연출력으로 스토리텔링의 아쉬움을 채우고자 한다.

피지에서의 신혼여행 시퀀스는 이러한 성지혜 감독의 연출의도가 빛을 발하는 영화의 백미다. 실제 ‘동물의 왕국’ 성우가 내레이터로 참여한 이 시퀀스에서 영화는 남녀관계와 동물의 짝짓기를 비교하며 묘한 풍자적 웃음을 자아낸다. 연애와 결혼의 환상을 걷어낸 이 시퀀스에서 영화는 동물적인 본능과 이를 억제하는 이성의 충돌이 빚어내는 코믹한 상황을 통해 남녀관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조금은 노골적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퀀스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자꾸만 관계를 거부하는 종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사실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점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영화의 막을 열었던 종훈의 내레이션이 왜 석연치 않은 여운을 남겨야 했는지 이유가 분명해진다. 100% 마음에 드는 관계라는 것은 사실상 그 순간의 감정에 의한 착각일 뿐이라고 <여덟 번의 감정>은 이야기한다. 불확실한 관계에 확신을 갖는 것이야 말로 감정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빤한 스토리 속에서도 신선함을 잃지 않던 영화는 종훈과 은주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로 급격히 에너지를 잃어버린다. 남녀관계에 대한 결론보다 관찰 자체가 더 중요한 영화는 어디서 이야기를 끝맺어야 할지 감을 잘 잡지 못하는 모양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홍상수 영화의 유사성도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홍상수 영화가 남녀관계를 바탕으로 일상에 대한 보다 깊은 철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면, <여덟 번의 감정>은 단순히 남녀관계가 변화하는 양상만을 보여줄 뿐 일상이나 삶과의 연계성까지 그 흐름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녀관계에 대해 보여주는 세밀한 시선, 그리고 독특한 형식과 구성에서 보이는 연출의 독창성은 <여덟 번의 감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장점 중 하나다. 끝내 은주와의 결혼 생활을 중간에 포기한 종훈은 옛 연인 선영과 또 다른 여인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 찌질한 태도의 종훈은 그러나 영화가 끝나는 순간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석연치 않은 여운으로 시작한 영화는 희망적인 여운으로 끝맺는다. 종훈의 선택처럼, 앞으로 성지혜 감독이 보여줄 선택과 희망의 여운 또한 궁금해진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