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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모모관객의 씨네토크 현장습격] '파우스트'편

 

강신주 철학자와 함께 하는 <파우스트> 시네토크 후기

 

 

Momo 시네토크의 첫 번째 일일기자 이슬기라고 합니다. ‘기자라고 하기에는 쑥스러울 만큼이나 한 게 없지만, 그래도 시네토크에 참여하지 못해 많이 아쉬워하시는 분들을 위해 강신주 철학가의 강의와 당일의 분위기만큼은 자세히 전달해보고자 해요. MOMO 페이지에 공유되는 후기이고 하니, 편안한 구어체로 쓰겠습니다.

 

 

 

 

첨부한 사진은 제주도에서 올라왔다는 한 청년 관객과 강신주 철학가의 우애 넘치는 포옹 장면인데요. 청년 관객이 며칠 전 한 신문에 실린 강신주 철학가의 논평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자, 강신주 철학가는 어우, 난 내 글 읽어주는 사람이 제일 좋아.”라며 관객을 끌어안습니다. 그 장면이 재밌어서 촬영을 했는데, 실제보다 너무 어색하게 찍혀 버렸네요. 어찌 됐든, 이쯤 되면 이번 시네토크의 분위기가 얼마나 친근하고 화기애애했을 지는 짐작이 가시죠?

 

 

영화 상영 후 매혹적인 OST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나자, 다소 심오한 내용에 제각각 졸거나, 멍하거나, 감상에 젖어있던 관객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립니다. 활발한 저작과 강연 활동으로 이미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강신주 철학가가 등장했기 때문이죠. 사실 강신주 철학가는 미리 구상해 둔 순수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대로 강연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일 <파우스트>를 두 번째로 보고 나자 영화에 대한 첫 시각이 완전 바뀌고 말았다 하네요. 강신주 철학가는 권력자=파우스트라고 말하는 홍보지의 시놉시스에 너무 의지하지는 말자고 제안합니다. 또 영화의 원작인 괴테의 파우스트와는 달리 해석해 볼 필요도 있다고 말이죠. 그렇다면 강신주 철학가가 바라 본 <파우스트>의 권력자는 누구이고, 괴테의 원작과는 무엇이 달랐을까요?

 

 

권력 4부작 중 마지막 <파우스트>, 권력자는 누구인가?

 

 

<파우스트>의 감독인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히틀러, 레닌,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까지 20세기 정치인, 독재자를 소재로 한 3부작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지배자는 꼭 파멸에 이른다고 하죠. 그리고 소쿠로프 감독의 마지막 4부작을 완성하는 <파우스트>에서, 권력을 가진 동시에 멸망하는 이는 바로 전당포주 뮐러입니다. 강신주 철학가는 바로 이 점을 상기시키더니, 느닷없이 만 원짜리 지폐를 가진 관객을 찾아 강연대로 불러 세웁니다.

 

, 그럼 이제 그 만원을 찢어보세요!”

 

여성 관객은 지폐를 사정없이 찢었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아우성이 터져 나옵니다. 강신주 철학가는 이 광경에서 우리가 얼마나 돈을 신성시하고 있는지를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100%에요.” 자본주의 체제 하에 사는 대중이라면 어김없이 돈에서 십자가를 본다는 것이죠. 자본의 신성은 <파우스트>에서 자본가를 대표하는 뮐러가 성모마리아 상에 사정없이 키스를 퍼붓는 장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납니다. 파우스트에게 살해당한 아들의 어머니를 위로할 때도 뮐러는 돈을 주죠. 하지만 돈, 즉 자본은 마치 뮐러의 앞뒤가 구분되지 않는 몸처럼, 그리고 동전의 양면처럼 신성성과 추악함을 동시에 지닙니다. 파우스트의 면전에서 방귀를 뀌는 뮐러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갖기도 했지만,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썩은 성질의 것이기도 합니다. 강신주 철학가는 괴테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하필이면 전당포를 운영하는 뮐러로 둔갑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권력 4부작의 마지막 편이 이 시대의 권력자로 자본을 겨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멀리, 더 멀리!”

 

 

이제까지의 권력 3부작에서 비참한 말로를 맞는 건 권력자의 몫이었듯, 영화 <파우스트>의 결말에서도 파우스트는 자본가 뮐러의 계약서를 찢어버리고는 뮐러를 돌로 쳐서 죽입니다. 다만 뮐러는 죽는 순간에도 끝까지 파우스트가 이 황량한 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말합니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미혹하며 사로잡고는 하죠. ‘너는 나를 멀리하고는 살아갈 수 없을 걸? 돈 없이는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자본주의는 이처럼 불안이라는 형태로 우리 곁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신주 철학가는 결말부에서 멀리, 더 멀리를 외치며 달려가는 파우스트가 더 이상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를 찾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떠돌다가 다시 자본주의 체제의 곁으로 돌아오게 될는지도 모르죠. 그만큼 악마를 떠난 파우스트의 여정이 힘겨우리라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덧붙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곁을 떠나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더 이상 자유에 대해서 논할 수도 없겠죠.

 

 

괴테의 파우스트와의 비교

 

 

강신주 철학가가 처음 강의의 제목을 순수의 폭력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은 괴테의 원작이나 영화 <파우스트>의 시놉시스에 은근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서구 사회 순수와 이성을 부르짖는 지식인들은 계몽주의라는 미명 아래 소위 야만적인 미개인들을 교화하고 일깨우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폭력으로써 작용했습니다. 이것이 괴테가 살았던 19, 20세기 서구사회 모습이며, 파우스트라는 지식인을 통해 우리는 이런 이성주의의 폭력성을 볼 수가 있다고 하죠. 그러나 강신주 철학가는 영화 <파우스트>에서의 권력자를 지식인 파우스트로 지목하게 되면 영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파우스트의 욕망을 쥐락펴락하는 밀러를 권력자로 보며, 영화 <파우스트>가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아우르는, 당대 서구문명의 총 집합체였다고 하죠. 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 역시 예술작품으로서의 완벽성을 톡톡히 드러냅니다. 강신주 철학가와 관객들이 모두 크게 공감했던 바는 단연 영화의 영상미였습니다. 헐리우드 상업영화가 생각할 여지없는 수많은 컷과 빠른 전환으로 관객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면, <파우스트>는 한 컷, 한 컷이 정지된 화폭처럼 관객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여타 상업영화에 비해 영화를 보는 데 더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러닝타임동안 팝콘 한 통을 먹 듯 영화 한 편을 소비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에서 거닐 듯이 직접 작품 하나하나를 공들여 응시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적막함에 숨도 갑갑하고, 이따금씩 허리가 아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파우스트의 방을 찾아온 금빛 마가레테는 영화의 기저에 깔린 침침한 어둠마저 일시에 걷어내어 버립니다. 개인적인 감회겠지만, 저는 집에 돌아가는 내내 , 영화 참 매혹적이었어.’라고 되뇌었죠.

 

 

영화는 다행히도, 또는 불행하게도, 관객 없이 존재할 수 있다.”

 

 

사실 쉽고 재밌게 관람할 수만은 없는 영화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헐리우드 영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본으로 만들어진 소비의 영화는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절대 주지 않으니, 강신주 철학가에 따르면 이 점은 고전과 베스트셀러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요. 대중의 욕망 구조를 읽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제공하는 베스트셀러들은 당연히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자본국가의 영화들이 돈에 휘둘리고 대중을 휘두를 때, 러시아의 영화들만큼은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업적 목적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다양한 영화적 기법들을 실험하고 감독 자신만의 예술적 경향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이 했던 말입니다. “영화는 다행히도, 또는 불행하게도, 관객 없이 존재할 수 있다.”

 

관객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 관객에게 아부하지 않는 예술.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치열하게 드러내는 예술.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예술. 하나의 작품은 어느 개인의 내면과 솔직한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그래서 강신주 철학가는, 우리가 특정 영화를 거북해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렵고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밑바닥까지 끌어내 이야기하는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영화이건, 소설이건, 내 욕망을 포착해 달래주는 매체가 아니라 오직 작가 자신을 표현하는 작품을 읽는 다는 건- 어쩌면 한 인간을, 고민하는 한 개인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행위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속에 사는 우리는 늘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수많은 상품에 길들여져 온 탓에, 더 이상 나와는 다른 이야기를 바라볼 만한 이해심을 내팽겨 친 게 아닐까요?

 

그러나 강신주 철학가는 결코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관점을 그대로 따라가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감독은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자신이 느낀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지만(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을 친절히 해석하고 설명해주지는 않기 때문에 결국 해석의 여지는 관객에게 있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끌어올려 감독의 화면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신주 철학가는, 프루스트의 한 사람이 눈을 뜨면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백 사람이 눈을 뜨면 백 개의 세계가 열린다.”는 말을 인용하며, “인문예술의 핵심은 고유명사.”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 앞에 열린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 안에서 각자가 느끼는 바는 때로는 극명하게, 때로는 아주 미묘하게 달라지곤 하겠죠.

 

 

 

, 넌 권력자가 누군 거 같아!”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상영관 밖으로 나오자 강신주 철학가가 큰 소리로 제게 물었던 말입니다. 촌스러워 보일까봐 내색은 안 했지만 실은 느닷없는 반말에 처음엔 깜짝 놀랐답니다. 금세 친근하게 느껴져서 더 좋았지만요. 여하튼, ‘권력자는 뮐러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간 혼날 기세에 겁이 났지만(농담입니다), “권력자가 여러 명일 수는 없나요?”라고 슬며시 반문만 하고 말았네요. 글쎄, 누굴까요. 이제 슬슬 후기를 정리하려고 하니, 이쯤 되면 <파우스트>에 대한 제 감상도 살짝 끼워 넣어볼까 합니다. 강신주 철학가에 따르면, 권력 4부작 중 이제까지 3편에서는 일인 독재자들이 등장했지만 <파우스트>에서는 권력의 형태가 자본의 신성이라는 무형의 권력으로 변모했습니다. 사실 저는 영화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이 MOMO를 찾았던 지라, <파우스트>가 권력을 이야기할 거라는 기대도 당연히 전혀 없었죠. <파우스트>를 바라본 제 고유명사는 진부하지만, 바로 욕망입니다.

 

영화에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고의적으로 눈에 띄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픔에 주려있다는 설정만으로 그치기에는 인물들이 음식을 먹는 장면은 유독 자주 등장하죠. 고상한 식사와는 달리, 게걸스러우리만큼 입에 먹을 것을 가져다 넣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지식욕, 식욕, 색욕,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욕망까지도, 영화 전반을 뒤덮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굶주린 개인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네토크 내내 계란 먹는 여자 씬(scene)이 화두였는데, 저는 그 장면 역시 욕망에 대한 상징이라고 봅니다. 야릇하게 신음하던 끝에 계란을 낳아 다시 그것을 허겁지겁 삼키는 여인의 모습은, 스스로 욕망을 배출하고 그것을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는, 끝나지 않는 굶주림같이 보입니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의 이미지도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는데요. 파우스트가 처음 마가레트에 대한 욕정을 품게 되는 곳이 바로 빨래터입니다. 악마 밀러는 그곳에서 편안하게 목욕을 하죠. 밀러에게 영혼을 판 후 얻은 처녀 마가레트와 강에 빠지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장면이 욕망의 절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욕망이란 단지 식욕과 색욕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의 초반부터 드러났던 파우스트의 지식욕이기도 하거니와, 파우스트와 그의 제자 바그너가 마가레트를 보고 느끼는 지고의 순수에 대한 열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삶에 대한 좌절에서 비롯된 죽음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기도 하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와 파우스트가 지리멸렬하게 빠져버린 허무주의를 보면서, 저는 10대 사춘기 시절에 강을 보며 흩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자살 충동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고, 정말 말 그대로 어딘가로사라지고 싶은 소멸에의 욕구였죠. 강신주 철학가가 경험을 끌어올려 이해한다고 말했던 게 바로 이런 걸까요?

 

사실 욕망하는 인물은 파우스트나 바그너처럼 남성과 지식인만이 아닙니다. 악마 뮐러의 곁을 빙빙 돌던 여인도 그렇고, 마가레트의 어머니 역시 돈에 눈이 멀어 아들의 죽음을 무마하죠. 아무런 욕망 없이 고결할 것 같은 마가레트도 다르지 않습니다. 안절부절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날마다 교회에 가는 마가레트는 고해성사를 통해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엄밀히는, 마가레트가 파우스트에게 일방적으로 쟁취되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밀러의 안내로 파우스트가 찾아간 강가에서 뒤를 돌아보는 마가레트의 표정은 어떤 환희를 담은 것처럼 오묘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의 구도와 방향에서 권력관계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권력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여러 명일 수는 없나요?”라고 되물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개인은 그 성질이 무언가를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든, 그 대상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파우스트와 마가레트의 관계에서는 마가레트가 하룻밤의 권력자이겠죠. 마가레트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지만 그녀에게 예외 없이 복종합니다. 전당포주 뮐러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어쩌면 욕망하는 바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정점에 서서 타인의 욕망을 일시적으로 해갈해 줄 수 있는 신의 전능함마저 가지고 있죠. 우리는 스스로는 달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영혼을 파는 계약서에도 서명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는 이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관점을 제시하기 보단 매혹적인 그림을 그리는 형태로 질문만을 던지고 있다고 봅니다. 굶주린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과연 죽음뿐인가? 욕망하는 인간에게 구원은 있는가? 파우스트는 영혼을 팔아넘긴 이후 죄수복을 입고 뮐러의 황무지를 떠돌게 됩니다. 그 곳에서 용암처럼 들끓으며 분출하는 샘을 보죠.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앞에서 파우스트는 나는 너를 안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욕망은, 알아차리는 것과는 별개로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갈증과도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 중에, 지하세계에서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는 형벌을 받는 탄탈로스의 이야기가 있죠. 허리까지 차 있는 물은 그가 물을 떠 마시려 하는 순간 순식간에 말라버리죠. 파우스트는 자신의 욕망을 이용하고 조롱한 뮐러를 죽이기는 했지만, 이후의 구원은 어디서 바랄 수 있을까요? 삶이 고통스러워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어도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쉬 죽지 못 하는, 그래서 결국 삶과 죽음 사이의 영혼 없는 공간에 끼어 방황하는 햄릿 식의 고민을 하며 계속 살아가야 할까요? 파우스트는 마지막까지도 더 멀리를 외치며 어딘가로 떠납니다.

 

 

후기를 마치며

 

 

간단한 취재 후기로 반 페이지 분량을 요청 받았는데, 쓰다 보니 벌써 다섯 페이지에까지 발을 걸치고 말았네요. 졸지에 긴 후기를 읽게 되어 버린 여러분께 살짝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만큼 강신주 철학가와의 시네토크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전달해 드리고 싶었고(그나마 줄이고 또, 또 줄인 것이 이렇습니다.), 쓸데없이 첨부되긴 했지만 제 감상도 짧게나마 나누고 싶었기에 전체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아직 <파우스트>를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영화의 음울한 속에서도 빛이 나는 묘한 마력에 빠져보시기를 바라며, 후기를 마칩니다. 우리 앞으로도 함께 고민해요.

 

 

글쓴이 : 모모 일일기자 이슬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