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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Z]큐레이터매거진 창간준비호

[큐레이터리뷰] 찬양하기엔 너무 먼 그대_노태훈


18951228, 파리. 그랑카페에 모여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관람하던 관객들은 스크린 속 열차에 치일까봐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고, 이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그로부터 약 120, 놀랍게도 3D로 코앞에 도끼가 들이닥쳐도 누구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관객들의 영화를 보는 역치가 높아졌다는 증거다. 영화가 발전을 거듭해오면서, 관객들이 옛날 영화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끼기가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이제 <열차의 도착>은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 별다른 시각적 쾌감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1957년에 만들어진 <산딸기>를 보는 것은 이 영화가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고전이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이렇게 정의했다. “A classic is a book which people praise and don't read." 많은 이들이 고전 작품을 찬양하지만 정작 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의 작품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좀처럼 고전영화를 관람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이는 그 영화가 가진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명확하게 잡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딸기>를 보고 글을 쓰기로 결심하는 데 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산딸기>는 비교적 친숙한 몇몇 작품들과 맞닿아 있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의미에서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한다. 하나는 학위수여식장을 향한 외적 여정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과 화해하기까지의 내적 여정이다. 주인공 이삭 보리 교수는 명예 학위를 받기 위해 긴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의 며느리가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둘은 자동차라는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차츰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데, 이는 미인대회 행사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미스 리틀 선샤인>의 가족을 연상시켰다. 또한 보리 교수는 여행 중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던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이 모습은 환상 속에서 자신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경험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게 된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산딸기>는 오래됐지만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크리스마스 캐롤> 만큼이나 세련된 방식으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미스 리틀 선샤인> 만큼이나 따뜻한 화법으로 관계회복과 진정한 자아와의 화해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꿈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소재인데, 영화 안에서 꿈과 현실은 매우 적절하게 대비되어 있다. 주인공 일행은 여행 중인 젊은 세 남녀를 만나 동행하게 되고 이 중 한 명인 사라는 과거 보리 교수의 옛 사랑이었던 사라와 놀랄 만큼 닮은 동명이인이다. 이 젊은이들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보리 교수를 힘들게 했던 사라와의 삼각관계와 연결된다. 아내를 불륜에 이르게 했던 주인공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길에서 만난 어느 부부의 끊임없이 다투는 모습과 이어진다. 또한 꿈에서 보았던 바늘 없는 시계는 주인공의 어머니께서 가지고 계시던 물건이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설정이지만, 마치 누군가가 계획이나 한 듯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징들 속에서 어쩌면 영화 전체가 거대한 꿈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후에 두 사라 모두 여배우 비비 안데르손의 12역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혹시 감독이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인셉션>의 결말 못지않게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삭 보리 교수가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타고 이동을 하게 된 건, 초반부에 자신이 관 안에 들어있는 불길한 꿈을 꿨기 때문이다. 이 꿈 장면을 보며 초현실적인 느낌이 달리의 그림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연스레 마그리트의 그림을 닮았다고 느꼈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오프닝 시퀀스가 떠올랐다. 바늘 없는 시계와 마부 없는 마차, 관 안에 있던 또 다른 주인공의 모습은 배경에서 새가 낙엽처럼 쏟아지던 <멜랑콜리아>의 오프닝만큼이나 인상 깊었다. 말 그대로 숨이 막히는경험을 하며 <멜랑콜리아>를 보고는 정말 강렬한 영화라고 엄지를 치켜세웠었는데 무려 60년 가까이 앞선 작품에서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렇게 뜯어보니 <산딸기>는 생각했던 만큼 이질감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니었을 뿐더러 현대 영화들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고전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괜히 겁을 먹었었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산딸기>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혀 이해를 못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앞선다. 이렇게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굳이 지금까지 회자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무엇을 느껴야 이 영화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위대한 유럽 문학에 필적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도래를 알린 작품.” <산딸기>에 대한 우디 앨런의 평이다. , 설마 유럽 문학을 공부해야 하나? 그러면 이 영화가 이해가 더 잘 될까? 결국 <인셉션>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며 감상해야 했지만, <산딸기>를 볼 때에는 평소와는 다른 눈으로 접근해야 하는구나 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모모의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며 그 을 키워 볼 생각이다. 엇 이거 내 얘긴데, 싶으시다면 어서 여기여기 붙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