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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Z]큐레이터매거진 창간준비호

[큐레이터 리뷰] 우연으로 새겨진 꿈 _ 송원재

                 

20살 여름 방학때, 유럽 여행 중에 영국 런던의 어느 미술관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안에서 렘브란트의 자화상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얼굴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본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잠깐 구경한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연히 맞딱뜨린 그림이 있었는데, 눈이 정말 맑은 한 소년의 자화상이었다. 그 자화상을 마주보는 순간, 그 소년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서 숨쉬고 있었고, 나는 그 시대를 지켜보며 현재를 살고있었다. 거기서 나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느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내가 예술이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영화를 통해 예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마치 자화상처럼, 어느 시대든 내 눈앞에서 가장 가까이 만나는 예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고전 영화를 지금 영화관에서 보게 되는 것 자체 또한 더욱 더 새로운 경험이다. 과거의 영화관에서 틀었던 것들을 현재의 영화관에서 디지털로 영사한다는 것. 이것만큼 현재의 내가 과거의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이러한 기회가 이번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영화 <산딸기>를 상영하면서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난 뒤, 내가 꿨던 꿈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가끔 잠에서 깨어난 뒤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꿈에서 벗어난 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꿈일 뿐이야’. 하지만 마음을 추스리는 데에는 결국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 <산딸기>는 꿈이 가지는 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내가 악몽을 꿨던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동안 시간이 필요했듯, 주인공인 이삭 또한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인 명예학위수여식을 앞두고 전날 꾸게된 악몽으로 인해 예약했던 항공기를 취소하고 스스로 운전을 해서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하기까지 한다. 아마 그가 꿈을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예전부터 악몽을 꿔왔을 것이고, 그때부터 시작된 불안감이 계속되다 떠나기 하루 전날 다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어떤 장소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있다. 그리고 그는 걸어가다 거리 위에 있는 시계를 보는데, 시계에는 시침과 분침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 곳의 시간을 가늠하지 못한다주인공 이삭이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장면이다. 이 꿈에서 나오는 장면은 마치 주인공이 자신의 집을 떠난 뒤에, 어떠한 저택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그는 그 저택의 정원에 앉아있다가,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산딸기를 따는 모습을 목격하는데, 그 순간부터 그는 끊임없이 과거의 환상을 목격한다. 그의 시간은 멈춰있지만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이 시간의 의미는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이 이후로 영화에서 산딸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산딸기가 전면에 등장하지도, 영화에서 그렇게 많은 장면에 나오지도 않은 이 제목을 베리만 감독은 쓴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베리만 감독의 출신나라인 스웨덴에서 산딸기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산딸기는 그 나라에서 여름날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동시에, 산딸기를 볼 수 있는 시기가 매우 짧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산딸기는 짧기에 더욱 소중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거울을 보여주면서 그가 얼만큼 늙었는지 확인시켜주는데, 그는 자신의 나이든 얼굴을 괴로워한다. 자신은 늙었는데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인 것이 그가 젊음의 때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산딸기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마치 꿈에서 그가 어떤 사람에게 말을 걸려다 그 나머지의 이목구비가 뭉개진 것을 목격하듯이 자신이 이미 죽음 앞에 있는 노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듯하다.



  그리고나서 주인공은 꿈에서 마차를 보는데, 그 마차는 지나가다 전봇대에 바퀴가 걸린다. 결국엔 걸려있는 바퀴가 빠지고 마는데, 이 장면은 주인공이 여행을 계속하다가 어떤 부부의 차가 전복되는 것을 목격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들의 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그는 그들을 자신의 차에 태우는데, 그 부부는 서로를 혐오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일삼는, 마치 주인공이 과거에 자신의 며느리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한다. 이는 베리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관계에 대한 상처를 그려낸 것이기도 한데, 그의 영화 <페르소나>에서도 보면, 주인공들의 상처를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처럼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삭은 며느리와 하는 여행에서 점차 그녀를 이해하고,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마차는 바퀴가 빠지면서 기울어지고, 마차에 있던 관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관은 주인공 앞에 열린채로 놓여지게 된다. 주인공은 조심스럽게 그 관으로 다가가는데 누군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놀라는데, 그 관 안에는 다름아닌 자신이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자신에게 손을 뻗는 순간, 그는 꿈에서 깨어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영화 전체를 다루는 주제인데, 죽음을 통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인 삶과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 당신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중에 어떤 순간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 중에 어떤 삶을 정리하고 싶은가? 이 질문을 감독은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자신의 죽음과 마주본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너무나 섬뜩한 일이지만, ‘죽음이라는 단어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죽음과 인생의 참의미를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꿈은 이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과 괘를 같이 하는데, 주인공이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누워있는 장면은 마치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려는 평온한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지금까지 묻어왔던 모든 것들을 화해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가 눈을 감으며 끝나는 영화는, 그의 꿈처럼 관에 들어간 그의 모습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 다시 잠을 청한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삭은 자신이 여행을 하며 깨달았던 것들과, 환상과 마주했던 것들을 여행을 통해 정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그가 꿈을 꾸고 있다면 더이상 악몽을 꿀 수 없지 않을까.

이처럼 영화 <산딸기>는 찰나의 우연한 순간들, 꿈 속에 지나가는 이미지들이라도 모든 것에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놓치지 않으려는 감독의 치열함으로 만들어졌다. 일상에서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짧은 시간으로 압축했을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우연한 순간들도, 결국엔 대부분 작은 이유들과 의미들로 채워져있다. 그러한 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해내고 보편적인 의미들을 끌어낼 때, 영화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영화들이 오래도록 우리 기억 속에 남아, ‘걸작이라고 불리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걸작이라는 영화를 보러다니는 관객보다, ‘흥행하는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을 벗어나고, 즐기기 위해서 영화관을 가는 것이 나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대중영화가 예술영화보다 수준이 낮거나, 가치가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는 가치의 높이가 아니라, 가치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예술영화를 통해서 영화를 보는 시야는 넒어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예술을 대면하면서 삶의 가치가 바뀌었듯이, 분명히 예술영화는 삶을 바꿀 수 있는 잠재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예술영화를 왜 보냐고 물어본다면,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