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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로맨스 / 에릭 로메르가 노래하는 사랑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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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휴 레인보우 영화제에서 에릭 로메르의 <로맨스>를 봤다. <로맨스>는 17세기에 쓰인 프랑스의 유명한 목가소설인 [아스트레]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목가소설이란 중세 유럽에서 양치기로 분장한 귀족 남녀가 전원을 배경으로 감상적인 연애를 하는 내용의 소설을 뜻한다. <로맨스> 또한 원작과 마찬가지로 아스트레와 셀라동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영화가 도입부에서부터 이 소설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영화가 촬영된 장소까지 소개하면서 영화의 매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이 영화가 극중극의 형식을 취하면서 이미지가 주는 환상을 배제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맨스>는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랑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객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연인 사이인 아스트레와 셀라동의 갈등은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내부의 사랑으로 인해 비롯된다. 물론 그들의 헤어짐은 셀라동이 축제에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소한 오해에서 출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부를 때까지 눈 앞에서 나타나지 말라는 아스트레의 외침으로 인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강물로 뛰어든 셀라동은 님프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되는데, 셀라동을 사랑해서 그를 붙잡아두려고 하는 님프조차도 크게 위협적인 인물은 아니다. 셀라동이 탈출해서도 바로 아스트레를 만나러 가지 않고, 연인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이유로 혼자 숲 속에서 기거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의 의상이나 님프의 존재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속의 세계는 신화적이다. 그러나 신화가 보통 선과 악,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같은 두 존재의 대립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에릭 로메르의 신화에서는 순환과 조화가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조롱하는 음유시인이며 광대인 이가 등장하는데, 그의 놀림을 듣고 셀라동의 형은 사랑은 육체와 영혼 중에서 하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에 관한 그들의 대화는 아폴론이나 아테나, 아프로디테 등이 모두 신이 가진 하나의 인격의 일부이며, 신이 여럿으로 존재하는 순간 더 이상 신이라는 개념으로 있을 수 없다는 사제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직선이 아니라 원형과도 같은 신화적 세계 안에서 연인의 갈등은 셀라동이 여장을 하고 아스트레의 옷을 입으며 점점 상대방을 닮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에릭 로메르의 전작들인 <영국 여인과 공작>이나 <삼중 간첩>에서는 그의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연애담 대신 이데올로기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영국 여인과 공작>에서는 아름다운 회화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로맨스>는 신화적 세계라고 하기에는 전혀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심심하게만 보이지만, 등장 인물들이 부르는 노래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특히 아스트레가 셀라동에게 앞으로 살아 있으라고 새롭게 명령하는 결말에서 노장 감독이 사랑과 더불어 생을 온전히 찬미하기 위해 <로맨스>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