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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레몬 트리> 답은 사람이랍니다.

참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일부러 틀리라고 어렵게 낸 시험문제도 그렇고, <우리결혼했어요> <12> 중에 뭘 볼까 고민하는 것도 힘들다. 하물며 친구와 점심시간 메뉴를 정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관계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나 자신과의 관계,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집단과의 관계,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과의 관계 등 내가 맺고 있는 숱한 고리들이 때로는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악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지 관계의 즐거움 만을 누릴 줄 알 뿐, 거기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애써 외면하려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다. 나와 관계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부인하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떠넘겨도 결국 한번쯤은 부딪혀야 한다는 것이 짧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교훈 중에 하나다. 단지 난이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속 좋은 사람들을 위한 말도 있지만 어찌됐든 피곤하고 힘든 일이긴 하다.


최고의 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갈등들이 중첩된 상황이 아닐까 한다. -타인-집단의 관계가 층층이 쌓여 어느 것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를 때, 분명 가만히 있으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개인의 존재가 한 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집단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조직일수록 자괴감은 그에 비례한다. 이런 때는 주위에서도 내 편 드는 사람이 없다. <쉽지만 비굴해지느냐, 힘들지만 당당해지느냐> 선택지의 답을 고르기가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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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의 살마 지단 역시 겹겹이 쌓인 갈등의 문제로 고민하는 여인이다. 갈등이 생기기 전까지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준 레몬나무와 그녀를 딸처럼 여기는 아버지 친구와 함께 굴곡 없는 삶을 사는 여인이었다. 팔레스타인 국적을 갖고 남편과 사별한 그다지 좋은 조건에 있지는 않았지만 레몬 키워 먹고 사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옆집에 이스라엘 장관이 이사를 오면서 그녀 역시 고난도 관계의 문제에 휩싸이게 된다. 단순히 옆집 사는 이웃과의 갈등을 넘어 그녀가 속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그녀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한 번 시작한 갈등은 문제가 없던 관계에 까지 상처를 입히기 시작한다. 엄마의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 가족과 갈등하고, 사별 후 그녀를 도왔던 남편의 친구와 갈등한다. 그녀를 돕는 젊은 변호사 지아드와의 관계에서 갈등에 빠지고,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그녀 자신과도 갈등한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래된 원한에서 비롯된 지단 개인의 문제이기에 해결은 난망하기만 하다.


지단이 모든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옆집 사는 나본 장관의 말처럼 레몬 나무를 잘라내고 보상금을 얻어 살거나, 나본이 부당함을 법원에서 밝히면 되는 것이다. 전자는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후자는 구조를 깨는 것이다. 전자가 쉽지만 비굴하다면 후자는 힘들지만 당당한 선택이 된다.


왜 전자는 비굴하고 후자는 당당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공권력을 개인에게 과도하게 행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속한 팔레스타인이 힘이 약한 나라이기 때문일까? 틀린 말도 아니지만 놀랍게도 지단은 영화 속에서 이런 식의 논리를 한 번도 강조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그녀의 레몬나무와 함께 그녀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히려 문제를 국가 간의 갈등으로 확대하는 것은 소란스러운 언론들이다.


문제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그대로 해결 방법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회복>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거대한 집단이 얽힌 관계의 갈등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을 찾는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메타포는 팔레스타인인 지단과 이스라엘인 미라(장관의 부인)의 관계다. 미라는 심적으로 지단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그녀가 속한 구조 안에서 그럴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한다. 그녀가 지단과 소통하기 위해 시도할 때마다 번번히 그녀를 가로막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개인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구조, 감독은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 반대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개인이 살아난 공동체에서 도덕과 윤리가 생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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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려보자. 우리와 일본, 우리와 북한의 관계 역시 구조가 개인의 선택을 봉쇄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역사가 고정시켜 놓은 구조에 따라 개인들은 행동한다. 이런 구조의 연속선에서 관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요원하기만 하다. 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개인과 공동체가 회복이 필요한 이유다. 회의주의자들은 구조가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들의 공동체가 가질 수 있는 파워에 대해 의심한다. 구조가 먼저 변해야 그 안에 주체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논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세계를 무대로 개인 간의 연대, 공동체 간의 연대가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을 만드는 현장들을 우리는 실제 눈으로 보고 있다.

 

지단과 미라의 관계가 영화 속에서 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선을 그리듯 그것이 현실의 모습일지 모른다. 미라는 그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선택을 했고 결국 이스라엘로 환유되는 나본을 떠난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나본과 지단 사이의 높은 담벽이다. 그 담벽을 다시 허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용감한 개인들이 뭉쳐야 하는 이유다.

 

P.S. 1> 영화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여성영화의 틀을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해묵은 갈등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를 보여주면서 주인공 살마 지단이 고통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살마 지단의 성장통. 이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이 될 수 있다. 보는 방향은 다양하니까……

 

P.S. 어둡고 무거운 메시지를 담은 영화지만 이 영화의 웃음 포인트는 간간히 등장하는 사진들이다. 살마 지단 집에 걸린 남편 사진의 표정이 그렇고, 그녀의 집에 실제 프랑스 축구선수 지단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 역시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