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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궤도] 삶이라는 이름의, 벗어날 수 없는 ‘궤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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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Life Track)
김광호 감독, 2007년

* 스포일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가급적 영화를 감상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궤도’는 레일을 깐 기차나 전차의 길을 뜻한다. 기차는 언제나 레일 위를 달린다. 그리고 한 번 레일 위를 달리기 시작하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레일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기차라면, 우리의 삶은 기차가 달리고 있는 레일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는 궤도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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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서 온 독립영화 <궤도>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삶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 하지만 영화에 담긴 남녀 주인공의 삶의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비관적인 태도마저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남자는 두 팔이 없고, 여자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들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는 남자가, 사스 환자라며 사람들에게 쫓겨 온 여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처지에 있는 두 사람도 서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신 두 사람은 서로를 멀리서 바라만 본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대부분의 쇼트들이 인물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점쇼트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마주볼 때마다 반복되는 이 시점쇼트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함과 동시에,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어떤 마음의 거리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그들을 ‘타자’로서 관찰하지 않으려는, 다시 말해 세상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동안, 그들의 삶의 방향은 과연 그들 스스로가 정한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을 ‘장애인’ 혹은 ‘사스 환자’라고 이름 붙인 세상의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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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 속에서 ‘궤도’는 직접적으로 남자의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리키기도 한다. 남자에게는 어린 시절 기찻길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마음속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났을 때 선뜻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잊고 있던 그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남자는, 세상이 자신에게 이름 붙인 ‘장애인’이라는 삶과 동시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영화의 갑작스런 엔딩은 그런 점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고나서 이 갑작스런 엔딩 때문에 조금 불편하였다. 시점쇼트로 인해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영화가 갑자기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삶이란 결국 정해진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어떤 운명론적인 태도가 느껴져서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제 아무리 행복하게 산들 그들에 대한 세상의 배타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남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상처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런 삶의 궤도를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찻길이 하나가 아니듯이 각자가 지닌 삶이란 궤도도 다르기 때문이다. <궤도>가 말하는 삶은 절망적이지만, 벗어날 수 없기에 마주해야만 하는 삶이다.

[덧1]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대사가 많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라서 영화감상에 큰 지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조선족들의 대화이다 보니 조금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들이 좀 있었다. 이런 부분들은 한국어 자막으로라도 처리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어쩌면 이런 것도 감독의 의도일지 모르겠다. 사실상 말을 통한 의사소통은 영화 속에서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하니까 말이다.

[덧2] 포스터가 참 맘에 든다.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포스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