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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여기보다 어딘가에] 꿈 없이 살아가는 20대의 ‘청춘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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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다 어딘가에 (Nowhere To Turn)
이승영 감독, 2007년
    
스물여섯에 찾아온 뒤늦은 성장통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우울한 청춘영화다. 청춘영화가 우울하다니 왠지 어색한 느낌이다. ‘청춘’과 ‘우울’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와 절망을 경험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시기가 청춘인 것처럼, 청춘영화는 절망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뤄왔다. 청춘영화가 밝고 유쾌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꿈과 희망을 잃은 청춘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는 자신들의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갓 스무 살이 된 네 소녀의 고민들이 담겨있었다. 노동석 감독은 <마이 제너레이션>을 통해 경제적 빈곤 속에서 꿈과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야만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개봉한 안슬기 감독의 <나의 노래는>은 20대 대학생을 주로 이야기한 기존 청춘영화와 달리 대학생이 아닌 20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이 겪는 또 다른 고민들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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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영 감독은 첫 장편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통해 세상이 두려워 세상과 벽을 쌓고 살고 있는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뒤늦게 겪게 되는 성장통을 이야기한다. 대학 졸업 이후 백수 생활을 해온 스물여섯 수연에게 유일한 꿈은 영국 리버풀로 유학을 가서 뮤지션이 되는 것이다. 수연은 하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고,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힘들지?”라고 물어도 수연은 끝까지 “힘들지 않다”고 말하고, 친구가 자신의 옷가게에서 일하라고 말할 때도 자신의 꿈은 돈이 아니라며 당당해 할 줄도 안다. 갓 스무 살이 된 <고양이를 부탁해>의 네 소녀들이 자신들의 불확실한 미래와 꿈에 대해 고민했던 것에 비하면, 확고한 꿈을 가진 수연은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 속에서 수연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그녀가 그다지 어른스럽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항상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연은 어른보다는 아이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수연의 꿈은 사실 두려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고만 하는 그녀의 태도를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수연은 유학비용을 벌기 위해 음악 콘테스트에 나가게 되면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랜 연습 끝에 수연은 콘테스트에 나가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순간 수연은 도망을 가고 만다. 처음으로 경쟁만이 가득한 무자비한 세상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경쟁은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기도 하다. 수연은 비록 뮤지션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실패의 아픔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 그동안 세상과 벽을 쌓고 지내왔다. 남들에게는 그렇게도 당당해하던 수연이 목적지도 없는 택시 안에서 서럽게 울던 것은, 그녀가 아직 어른이 아니라 아이였음을 드러낸다. 스물여섯에 겪게 된 뒤늦은 성장통. 영화 속 수연의 눈이 항상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현실 세계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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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왜 스물여섯이 돼서야 이토록 쓰라린 성장통을 겪게 된 것일까? 그리고 어쩌다 청춘은 이렇게 우울해진 것일까? 영화는 이런 질문들에 직접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청춘에 드리워진 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의 그림자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의 20대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그렇다. ‘88만원 세대’는 20대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담긴 비관적인 이름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10대 시절을 입시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는 바람에 그 시절에 으레 겪어야 할 성장통을 뒤늦게 겪게 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도 해보지 않고 현실에 발을 붙이기도 한다. 콘테스트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도망을 가고 마는 수연처럼, 실패가 두려워 도전해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고 마는 청춘의 모습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또 다른 단면임에 틀림없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수연이 지나치게 4차원적인 캐릭터로 보이기 때문에 영화에 담긴 이야기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20대 청춘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킬지 의문이 든다. 수연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영화가 보편적인 이야기보다는 좀 더 특별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연이라는 캐릭터에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감상도 달라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수연과 수연의 대학친구 동호,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뮤지션 현 사이의 갈등도 그다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 셋의 관계는 벤 스틸러가 감독 및 출연하고 위노나 라이더, 에단 호크가 주연을 맡은 <청춘 스케치>를 떠올리게 한다. <청춘 스케치>는 레이나가 현실적인 마이클과 이상을 꿈꾸는 트로이 사이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통해 현실과 이상에 대한 20대의 고민을 그 세대의 시각으로 그려냈다. 수연과 동호, 그리고 현의 관계도 <청춘 스케치>의 그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동호와 현은 마이클과 트로이처럼 둘 사이의 대립관계가 명확치 않다. 그리고 수연 역시 레이나와 다르게 두 남자 사이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들과의 관계를 자꾸 피하려고만 하기에 세 사람의 갈등은 조금 밋밋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세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두는 영화의 중반부는 조금 쳐진 듯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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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음악에 대한 꿈을 갖고 있지만 현실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주인공 성우 역을 맡았던 배우 이얼은 <여기보다 어딘가에>서 수연의 아빠로 등장해 수연에게 “힘들지?”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 장면에서 “힘들지?”라는 질문은 마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성우가 받았던 “성우야, 행복하니?”라는 질문의 반복처럼 보인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할 청춘들에게 그런 질문이 주어지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여기보단 어딘가에>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청춘영화다. 하지만 수연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에게는 동병상련과 같은 위로는 전할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