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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바벨> 모두의 슬픔을 위한 동화

<바벨> 모두의 슬픔을 위한 동화


U.S.;2006;142min;35mm;color
Director: Alejandro Gonzalez Inarritu
Cast:
Brad Pitt, Cate Blanchett, Gael García Bernal Kôji Yakusho


내가 2년 2개월 동안 군복무를 한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였다. 대부분 가구제작이나 합성수지, 플라스틱 제조 등 단순 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장이었기 때문에 노동비 절감의 차원에서 동남아시아 쪽의 외국인을 많이 고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간부와 함께 인근의 부대찌게 집을 찾았고, 평소 좋아하던 음식은 아니지만 모처럼 먹는 사제밥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시장이 반찬이라 음식이 나오길 애가 타게 기다렸지만, 음식이 나오는 순간 눈에 익지 않은 장면에 순간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공장에서나 봤음직한 외국인이 찌개와 반찬이 담긴 쟁반을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털이 덥수룩히 난 사람의 손을 통해 식탁에 내려놓은 김치를 본 순간 허기가 만들어 놓은 내 식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김치와 동남아인의 손이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기의의 충돌이 나의 식욕을 갈가리 찢어놓은 것이다.

편하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걸어 나오며 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적어도 나 만큼은 '속좁은 대한민국 남자'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정치의 부조리, 경제적 불평등, 부도덕한 국제관계들을 통렬히 비판했고, 사회의 구조적 한계로 약자가 되어린 사람들을 가슴으로 모두 감싸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난 깨였고, 쿨하고, 열린 생각을 가진 바람직한 청년이어야 했고 진정으로 난 그런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책이 만들어 준 지식에 불과했다. 그 때 식당에서 내 모습은 나 역시도 동남아시아인을 톱밥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이런저런 기계의 기름칠에 찌든 옷을 입은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아닌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던 지식들은 식당에서 찰나의 경험을 통해 불씨를 잃어버린 싸늘한 재처럼 식어 버렸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굳어진 것도 그 일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어줍잖은 지식은 오히려 무지보다 더 큰 위선과 교만을 배태할 수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그들과 소통을 이루기 위해, 내 눈에 덮힌 만겁의 위선을 씻어버리기 위해 가슴까지 뜨겁게 할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바벨>은 필름이 다 돌아간 과거의 기억을 다시 재생시켜 놓았다. 전작 <21그램>을 통해 3차원적 '시간'의 연속성을 거부하고  천피스 퍼즐처럼 조각난 순간들을 스크린에 던져 놓았던 감독은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원인과 결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버거운 21그램에 주목했다. 감독은 <바벨>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공간'에서 풀어가고 있다. 미국, 멕시코, 일본, 모로코... 세계지도에서도 손끝을 따라 한참을 여행해야 하는 이 네 공간에서 벌어지는 네 가지 이야기는 전혀 다를 듯 보이지만 나비의 날개짓과도 같은 작은 인연이 타인의 삶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릴 폭풍과도 같은 시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살한 아내와 언어장애를 가진 딸과의 관계에 갈증을 느끼는 일본인은 아프리카 사냥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에게 총을 선물하고, 가이드는 몇 푼의 돈과 몇 마리의 염소에 그 총을 친구에게 되판다. 주인을 옮긴 총은 아이들의 내기에 의해 모로코를 여행하고 있던 미국인 부부를 위기로 내모는 무기가 되고, 그 위기는 바다 건너 보모의 멕시코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결국 개인에게 닥친 고통은 절대 나로 인한 것이 아닌 인연이라는 인과관계의 부산물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없는 타인과의 선택할 수 없는 운명과 매듭지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작가 김연수가 말하듯 '그 누구의 슬픔도 될 수 없는' 우연적 존재가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 슬품들은 결국 외딴섬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인연 속에서 허덕이는 인물들이 심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이유는 '소통의 부재'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보여주듯 지도 위의 거리 만큼이나 인물들 간의 소통은 아득하기만 하고, 이해를 위한 과정이 아닌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는 비단 언어의 같고 다름이라는 단순한 문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같은 공간과 같은 언어가 소통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소통은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하는 이해의 과정이기보다 받아드림이라는 감정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소통의 부재로 사람들은 운명처럼 짊어져야 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소통'에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치에코처럼 자신을 발가벗겨서라도 소통의 대상을 찾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안아줄 사람을 말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듯 소통의 부재는 개인의 문제로만 단정지을 수 없다. 그 문제는 결국 국가를 넘어서는 국제 정치, 경제라는 구조 속에서 부추김을 당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서 미국경찰과 멕시코인 사이에 이어지는 끊임없는 긴장과 미국인 관광객이 모로코 주민들에게서 자신들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는 위협을 느끼는 것은 언어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정치, 경제적 경험이 더 큰 원인인 것이다. 내가 외국인 노동자의 손에서 느낀 감정 역시 정치, 경제적 경험에 의한 소통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소통을 위해 개인이 벗어나야 할 이러한 중층의 장애는 가능성 제로의 도전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 틀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기를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틀을 깨기 위해 발버둥치는 내가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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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라틴영화제에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을 다시 봤다. 2년 가까이 지나서 다시 한 번 후회 없이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감동을 얻고 질문이 남았다. 2년 동안 과연 트라우마와 같은 군대에서의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한 공부와 행동들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진지한 고민의 기회가 됐다. 대답 역시 변하지 않아 아쉽고 답답한 마음이 크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본다. 어디서 나온 긍정적 마인드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