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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멋진 하루>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


<멋진 하루>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

Korea;2008;123min;color
Director:이윤기
Casting:전도연, 하정우, 김혜옥

이윤기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전도연의 11번째 영화 <멋진 하루>가 한창 상영중이다.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벼르다 일요일 저녁에서야 이삿짐을 대충 정리하고 극장을 찾았다. 새집, 새가구, 새집기들이 반가울 줄만 알았는데 스산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익숙한 동네의 익숙한 풍경과 향기를 떠나 낯선 곳에 혼자 서 있는 느낌 정도로 표현이 될까? 아무튼 새 동네 극장은 어떻게 생겨먹었나 확인해볼 겸 겸사겸사 발길을 잡았다. (티켓 대신 웬 영수증 쪼가리 하나 줘서 완전 짜증났다. 갈수록 멀티플렉스는 정말 상종 못하겠다 싶다.) 

전작들에서 흥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이윤기 감독은 네 번째 영화에서 전도연과 하정우라는 지금 충무로 최대의 우량주와 블루칩을 물었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흥행은 작품의 색깔과 동시에 고려해야 할 십자가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더욱 궁금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언어를 이전 작품들을 통해 나름대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던 이윤기 감독이 이름값한다는 배우들을 만나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전도연과 하정우의 만남이 어땠을지, 와이드릴리즈가 되는 만큼 흥행은 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영화 자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적이 참 오랜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멋진하루>는 영화를 보기 전처럼 보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든 작품이다. 이처럼 잔상을 오랫동안 깊게 남기는 영화 역시 참 오랜만인듯 싶었다. 영화는 희수(전도연)의 시점에서 진행이 된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빌려준 350만원을 받기 위해 무작정 찾아온 희수. 그녀는 왜 돈이 필요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단지 시종일관 짜증나는 표정과 말투로 빚독촉만 계속할 뿐이다. 하지만 병운(하정우)은 그런 희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받아준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태도에 빈정이 상할 법도 하지만 병운은 오히려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선다. 그런 병운을 희수는 따라나선다. 오늘 꼭 돈을 받아야겠다고, 돈 떼먹고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둘러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닌듯 하다. 그렇게 그들의 <멋진 하루>가 시작된다.

병운은 희수의 돈을 만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꼬깃꼬깃 접힌 전화 목록을 뒤지면서 돈을 구할 상대를 물색한다. 사업에 성공한 중년 여성, 잘 나가는 술집 여성, 마트에서 일하는 이혼한 초등학교 여동창, 스키 강습 제자, 자유분방 친척 부부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후배 부부까지 병운은 하루 동안 멋지게 350만원의 돈을 만들어 낸다. 돌려막기의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환상적이다. 성별, 직업, 나이를 불문한 폭 넓은 병운의 인관관계의 승리였다. 병운의 관계들에 뛰어든 희수는 의아하면서도 짜증스럽게 그 관계들을 대한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도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병운씨 힘들면 내가 도와야지."라는 말을 당연스레 뱉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배려인듯 착한 척 행동하는 병운에게 짜증을 느낀다.

하지만 병운과의 하루가 진행되면서 두꺼운 스모키 화장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던 희수는 점점 무장해제를 당한다. 무언가를 깊이 숨기고 그렇게도 병운을 원망했던 희수는 그녀의 예기치 않은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희수의 말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난다. 결혼에 실패하고 일자리까지 잃은 자존감 강한 희수는 원망할 수 있는, 기댈 수 있는, "넌 잘 할 수 있어"라고 다시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350만원은 희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병운과 같은 '사람'이었다.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돈을 위해 굳이 경마장까지 찾아간 희수에게 병운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병운은 일종의 치료제였을 것이다. 굳이 구구절절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대.

희수의 변화는 희수와 병운이 처음 찾아갔던 한여사(김혜옥)에서 마지막 미혼모 은정(장소연)을 만나는 과정에서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병운과 한여사의 관계를 역겹게 바라보던 희수는 세미, 홍주, 병운의 친척 부부, 소영을 만나며 타인에 대해서 꽁공 닫아두었던 빗장을 열기 시작한다. 마지막 은정에게 40만원의 절반을 나눠갖는 희수는 결국 타인과의 완전한 공감을 완성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많이 하는 얘기지만 타자와 자아는 애초에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나의 타자를 만드는 일은 다른 하나의 자아를 만드는 일이다. 타자에게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관계는 생성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희수의 문제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무엇이 인과관계의 앞과 뒤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타자와의 관계 역시 거부하는 것이고, 반대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자신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희수는 지금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병운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병운과 돌아다니며 만났던 모든 인물들은 모두 희수라는 존재의 하나의 단면들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학 맞은 소영은 희수의 과거이고, 부잣집에 시집가서 자존심 구기고 사는 홍주는 희수가 결혼을 했다면 될 법한 인물이다. 희수는 그렇게 타자 속의 자신을 발견하며 자기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

희수는 살면서 분명 다시 병운을 찾을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아마 다 못 받은 20만원과 견인비 등등을 마저 받으러 왔다고 투덜대며 다시 그와의 하루를 보내자고 할 것이다. 포스팅의 제목을 <Human Therapy-대인관계향상 1日투어>라고 붙이기는 했지만 희수는 타자와의 관계와 함께 무엇보다 자기를 지키는 법,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을지 모른다. 하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거니까... 대인관계로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단비 같은 힌트를 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병운의 능청맞음과 전도연이기에 가능했을 법한 온몸 연기(?)가 이윤기 감독의 영화 속에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영화의 아슬아슬한 스토리를 따라는 것과 동시에 두 배우의 앙상블을 보는 것 역시 멋진 경험이다. <여자, 정혜>에서 그저 묵묵히 정혜의 뒤를 밟던 카메라는 이번에도 희수와 병운을 따라 서울의 곳곳을 비춘다. 서울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