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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13th PIFF> 1박 3일 방문기

<3일-내려가기>

개천절인 금요일 밤 11시 서울역에서 무궁화호에 올랐다. 가방에 노트북과 티셔츠와 가디건 한 장씩, 속옷과 양말만 대충 챙겨넣고 도망가듯 밤기차를 탔다. 5시간이 넘는 열차 여행은 4시 20분 목적지 부산역에서 멈췄다. "이제 힘 들어서 무궁화 못 타겠다."고 투덜대며 열차를 빠져나왔다. 새벽임에도 열차는 꽤 많은 사람들을 토해냈고, 역사 안에도 꽤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 나처럼 영화제를 찾은 사람들인가?"라는 생각에 3년 만에 부산영화제를 다시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물론 떨림과 두근거림과 함께.

친구와 부산행을 갑자기 정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티켓 예매는 물론 숙소까지. 내려오기 전, 잠깐 동안 해운대 근처의 호텔, 모텔에 전화를 했지만 "오늘은 해운대에서 방 구하기 힘들건데요."라는 말만 계속 들어야했다. "남포동은 그래도 하룻밤 묵을 곳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택시를 잡았지만 그곳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한 시간 쯤을 헤맨 뒤에야 자갈치 시장의 짠 바다냄새가 고스란히 올라오는 한 모텔에서 겨우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긴 열차 여행과 방 잡으러 돌아다녔던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와 그대로 쓰러져 점심을 훌쩍 넘겨 모텔을 기어나왔다.
 
<4일-돌아다니기>

야속하게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남포동을 한 바퀴 훑어보고 해운대로 곧장 자리를 옮겼다. 예전에는 부산영화제하면 남포동이었는데 이제는 어쩐지 이전만큼 분위기가 나지 않는 듯했다. "썰렁하네." 기념품 부스에서 그나마 잠시 머무른 뒤 설렁탕 한 그릇을 허겁지겁 헤치우고 해운대에서 5시와 8시 영화를 골랐다. 어차피 티켓 남는 영화 아무거나(?) 보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조바심은 없었는데 해운대 메가박스 매표소 앞에 세워진 상황판에 거의 모든 영화가 매진된 걸 보고서야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기왕 영화제 왔으니 그래도 영화 몇 편은 봐야지 않겠나. 다행히 티켓 교환 부스 앞을 서성이다 5시 영화 <워낭소리>와 8시 영화 <수치 disgrace> 티켓을 구했다. 힘겹게 구한 표를 들고 친구와 "우리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라며 쓰게 웃고는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국제영화제인데 영화들이야 검증됐겠지... "라고 자위하며.

<워낭소리>는 노부부와 그들이 키우는 소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낸 인간극장류의 다큐멘터리다. 시작 전에 상영관 앞에서 손수건을 나눠줬는데 끝날 때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사의 마케팅이 적중한 듯. 영화가 끝난 후 진행된 GV에서도 노부부와 영화 제작에 대해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누군가 너무 감정이입이 됐다고 지적을 했는데 꼭 다큐멘터리가 건조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도 영화의 한 장르인데 굳이 그 외연을 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다음 영화가 남포동이었기 때문에 GV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거의 1시간을 걸려 아슬아슬하게 남포동 대영극장에 들어갔다.

다음 영화는 <수치 Disgrace>.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존 말코비치가 나왔다. "이 영화가 범상치 않겠다." 싶었는데 역시였다. 정말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포스트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대한 정치적 함의가 느껴졌고, 아버지(존 말코비치)의 성적 메타포가 강한 어떤 메시지들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고 쏟아졌다. 극장을 나와서도 한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나 이 영화 잘 모르겠다."는 말로 매듭졌다. 올라와서 영화를 검색해 보고 알았는데 존 쿳시의 소설 추락(disgrace)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부터 애매모호하던 메시지들이 형체를 갖고 잡히기 시작했다.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었군." 존 쿳시의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밖에 보지 못했는데 왠지 존 말코비치는 최적의 캐스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따로 포스팅을 할 계획)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온 친구와 다시 만나 모텔 옆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를 먹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식은 아닌데 부산에 왔으면 꼭 먹어야 한다는 친구의 성화에 무작정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도 바닷바람 맞으면서 먹는 음식이라는게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힘드니 분위기는 그럭저럭 좋았다. 손님을 게의치 않고 맛깔나는(?) 욕을 섞어가며 열심히 싸웠던 1번과 8번 가게 아주머니의 타이틀 매치를 보면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TV에서 최진실의 삼우제를 보고 친구와 그녀에 대한 몇 마디를 나눴더니 벌써 2시가 가까웠다. 자야 한다면 침대에 누웠는데 친구가 예상에 없던 <연애불변의 법칙-커플 브레이킹>에 빠져 5시에야 잠이 들었다. 일찍 일어나서 11시 타임 영화봐야 하는데 말이다.

<5일-올라오기>

당연히 아침 11시 영화를 패스했다. 둘다 침대에 등짝이 달라붙어 버렸다. 그래도 오후에 서울로 짐 싸들고 올라와야 하니 2시 영화는 꼭 보겠다는 생각으로 모텔을 힘겹게 빠져나왔다. 예상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길. 편의점에서 우산 2개를 사고 남포동으로 나왔다.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북적 우연히 아는 부부(?)를 만나 남포동 골목 깊숙이 숨어 있는 회국수 집에서 점심 요기를 대충하고 부산극장으로 갔다. 분명히 <순회상영>인 줄 알았는데 표를 보니 <이방인>이었다.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지. 뭐 아무거나 봐도 상관 없었지만 부산극장 2관과 3관이 붙어 있어 살짝 3관으로 들어가 인기작 중 하나였던 <신은 없다>를 봤다. 매진이라더니 제법 빈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신은 없다>는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허구성을 유머와 위트를 섞어 비꼬는 다큐멘터리였다. 중간중간 외국인들만 크게 웃는 바람에 덩달아 따라 웃긴 했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쿨(?)하게 넘기는 그들의 태도가 부럽긴 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국내에서는 절대 상영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둑 관람하길 잘한 듯. 원래 이 영화를 보고 서울로 올라올 예정이었으나 못내 뭔가 아쉬워 친구와 한 편 더 보기로 했다. 어렵게 티켓교환소에서 구한 영화는 스페인과 칠레의 합작 영화 <좋은 인생>. 칠레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다수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전개되는 영화였다. 각자 사연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무심한 듯 살아가지만 결국 네트워킹 되어 있다는 소소한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영화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영화가 끝나고 나니 집에 가는 일이 급해졌다. 기념부스에서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노포동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내려올 때 무궁화에 너무 시달려 갈 때는 우등타고 편하게 가자 했지만 하늘은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매진된 우등을 피해 8시 15분 일반 버스를 타고 새로 놓인 부산-대구 고속도로를 탔다. 피곤했는지 타자마자 한 시간을 미친듯이 자고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거리들로 요기를 했다.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는 거의 끝나가는 여행이 아쉬워 친구와 내내 수다를 떨었다. 이런저런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12시 반이 가까운 시간에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줄지어 있는 택시를 같이 타고 친구를 내려놓고 집에 도착하니 1시가 조금 넘었다. 한 숨 한 번 길게 내뱉고 내일부터 또 어떻게 일주일을 시작하나 투덜대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독풀기>

다음 날부터 미친듯이 수업 준비를 하면서 중간중간 1박 3일 짧은 여행을 떠올렸다. 즐겁고 유쾌했지만 왠지 예전에 느꼈던 감동들은 없었던 것 같다. 남포동 거리를 빼곡히 채웠던 영화 부스들이 사라졌고, 그 앞에서 기념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있던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이 없었다. 부스들은 모두 해운대로 이동했지만 영화와 상관 없는 기업 부스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업 홍보장이 된 것 같아 해운대에서는 쓸쓸한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 점점 영화제가 관객과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아직까지 입가를 씁쓸하게 적신다. 그럼에도 내년에도 또 가야지 생각하는 걸보면 참 나도 답이 없긴 하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