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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락의 전설 - 라떼 에 미엘레 내한공연

음악 공연 부문에서 볼 때, 세계 음악계에서 우리나라는 변방에 위치한 작은 시장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들이 내한 공연을 오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월드 뮤직에 해당하는 콘서트들도 종종 열리며, 최근에는 크고 작은 뮤직 페스티벌의 개최로 다양한 음악을 무대에서 접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매니아들이 목빠지게 기대하는 수준높은 뮤지션들의 내한은 성사되는 일이 많지 않을 뿐더러, 가끔씩 일본에 공연 왔다가 우리나라에도 들러주기를 고대하는 구차한 현실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라떼 에 미엘레(Latte E Miele)"의 내한 공연은 감격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단독 공연을 한다는 점은 더욱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물론 197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1600장이 팔렸던 라떼 에 미엘레의 Passio Secundum Mattheum 앨범이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에 소개되어 지금까지 2만장에 가깝게 팔렸다는 특이한 기록이 이 공연을 성사시킨 큰 요인이기는 하겠지만, 재작년과 작년에 각각 방문한 P.F.M.이나 New Trolls 가 일본 공연과 함께 기획된 것과 비교하면, 라떼 에 미엘레의 공연은 정말이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0월 7일 8시 LG 아트센터에서는, 20년 넘게 그들의 음악을 사랑하던 팬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고, 열렬한 환호 속에 두 번의 앵콜 곡이 이어졌으며, 공연 후 사인회의 줄이 그토록 길게 늘어선 광경 역시, 흔치 않은 볼거리였다. 그들의 새 앨범인 CD에 사인을 받는 사람도 많았지만, 낡고 닳도록 들어온 그들의 LP를 들고서 사인 받으려고 줄을 선 열혈 팬들의 모습에는 가슴 찡한 무언가가 있었다.


대부분 FM 심야방송을 통해 입문하여 국내에 어느 정도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는 프로그레시브 락 팬들에게 있어서 이탈리안 프로그레시브 락은 유난히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프로그레시브 락 특유의 웅장함과 정교함을 가지면서도 이탈리아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을 녹여내는 그들의 음악이 우리나라의 정서와 잘 맞아서일까. P.F.M. 이나 뉴 트롤즈도 간과할 수 없지만, 라떼 에 미엘레의 PSM 앨범은 (비록 상투적인 표현일지라도) 이탈리안 프로그레시브 락 중에서도 성서에 비견되는 음반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그들 가사의 종교적 색채는 그러한 이미지를 더욱 굳혀주기도 한다.

1971년 제노바에서 결성된 라떼 에 미엘레는 키보드의 올리비에로 라까니나(Oliviero Lacagnia), 드럼의 알피오 비딴자(Alfio Vitanza), 기타의 마르첼로 잔까를로 델라까사(Marcello Giancarlo Delbrasa), 세명의 멤버로 구성되었으며, 강한 클래식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재즈, 메탈, 락 등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당시 10대에 불과했던 그들은 바하의 영향을 받은 Passio Secundum Mattheum (마태 수난곡)으로 놀라운 데뷔를 했으며, 두번째 앨범인 Papillon에서는 애잔한 멜로디가 특징인 동시에 역시 오케스트레이션과 코러스가 훌륭한 배합을 이루는 대곡을 선보였다. 이번 공연에서는 국내 코러스 단원들을 대동하고 베이시스트 마씨모 고리(Massimo Gori), 키보디스트 피노 나스타시(Pino Nastasi)가 세션으로 참여하여 PSM과 Papillon, 그리고 그들의 신곡을 들려주었다. 베토벤, 바하, 비발디 등 클래식 곡들의 수준 높은 편곡과 변주, 즉흥 재즈풍의 현란한 연주가 어우러지는 이들의 음악을 (다소 미흡한 음향 조건이 안타까왔지만) 라이브로 듣는다는 것은 정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이들의 음악을 접하고 잠못 이루던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던 이번 공연은 나에게,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함께 각인된 추억과 감성을 되살리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그와 더불어 사인회에서는 깜짝 선물을 받았는데, 바로 기타리스트 마르첼로의 유럽식 인사를 받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공연 내내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트릭 기타를 번갈아가며 아름답고도 강렬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아직도 미성을 유지한 보컬로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준 그가, 사인회 도중에 내가 악수를 청하자, 갑자기 일어나서 양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듯.

 


이로써 LG아트센터가 기획해 온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라떼 에 미엘레 공연에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온 꼬마에서부터 젊은 세대들도 종종 있었지만, 이번 공연의 예매자 평균 연령이 30대 후반을 기록했듯이, 8,9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심야 라디오를 통해서 배양되던 프로그레시브 락 매니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가진 느낌이랄까. 다양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문화 다양성을 누릴 수 있었던 시기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인터넷의 물량 공세 속에서 문화적 취향을 조심스럽게 다듬어나갈 수 밖에 없는 척박한 현실에서 이번 공연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