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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도쿄!] 삭막하거나, 추악하거나, 외로운 도시



도쿄! (TOKYO!)
미셀 곤드리, 레오스 까락스, 봉준호 감독, 2008년

개성으로 똘똘 뭉친 옴니버스영화    

알록달록 예쁜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는 오프닝과 달리, <도쿄!>는 영화 전반에 비관적인 분위기가 스며있는 영화다. 미셀 곤드리, 레오스 까락스, 봉준호 감독은 도쿄의 화려한 모습 대신, 그 화려함 속에 감춰져 있는 도시의 풍경들을 30분 남짓의 단편으로 담아냈다. 삭막하고, 추악하며, 외로운 도시의 모습들이다. 물론 영화가 비관적이라고 해서 어둡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도쿄를 세 명의 감독이 각자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미셀 곤드리 감독의 <아키라와 히로코>로 문을 연다. 원제는 ‘Interior design’으로, (미셀 곤드리 감독의 연인이기도 한) 만화가 가브리엘 벨의 원작을 배경만 뉴욕에서 도쿄로 바꿔 재구성했다. 영화는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연인 아키라(카세 료)와 히로코(후지타니 아야코)의 이야기다. 꿈을 찾아 도시에 온 젊은 연인들, 그러나 도시는 그들을 받아주기에 너무나도 삭막한 곳이다. 영화의 시작은 사실적이지만, 끝은 변함없는 곤드리식 판타지다. 상상력 넘치는 결말이지만, 그 속에서 삭막한 도시의 풍경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삭막한 도시는 사람도 변화시킨다. 능력을 인정받은 아키라와 달리, 주위로부터 구박만 받는 히로코는 결국 도시에 편입하기 위한 ‘존재의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마치 유령처럼 살아가는 도시인의 모습이다. 예상치 못한 결말은 그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이 나오기보다, 그 속에 감춰진 슬픈 진실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레오스 까락스 감독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9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광인>은 세 편의 단편 중 가장 괴상한 영화다. 도쿄 시내에 미친 남자(드니 라방)가 출몰한다. 하수도에 올라온 괴이한 몰골의 이 남자는 시민들에게 온갖 역겨운 행동으로 도시를 공포로 몰아간다. 도시 밑에 존재하는 하수도는 곧 도시가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도시가 감추고 싶은 온갖 추악한 것들이 숨겨져 있다. 광인은 그 추악한 것들을 시민들에게 다시 상기시키는 존재다. 그가 하수도에서 수류탄을 꺼내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것은 곧 일본인이 감추고 싶은 제국주의 시절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레오스 까락스는 <광인>을 통해 일본인의 잠재의식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광인>은 도시에 대한 조롱과 풍자로 가득한 영화이기도 하다. 마침내 붙잡힌 광인은 재판을 받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댄다. 시민들에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이성이란 이름으로 배제된 광기의 상징이다. 광인에 대한 시민들의 상반된 반응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이성과 광기가 충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추악한 모습을 들춰내며 동시에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광인>은 그야말로 광기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영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낡지 않은 레오스 까락스의 연출력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반가운 작품이기도 하다.


두 편의 영화가 절망적인 풍경을 전해준다면, 봉준호 감독은 <흔들리는 도쿄>를 통해 아주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던진다. 물론 그것은 매우 실낱같은 희망이다. <흔들리는 도쿄>는 세 편 중 가장 친절한 영화이며, 또한 봉준호 감독의 치밀한 연출이 빛을 발하는 ‘완벽함’이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일본만의 캐릭터(?)인 히키코모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히키코모리가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고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도시인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과장된 도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1년째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고 있는 이름 없는 남자(카가와 테루유키)가 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경계하려는 듯, 완벽하게 정리된 집에서 보내는 그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그런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피자를 배달하러 온 소녀(아오이 유우)다.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눈을 마주쳐본 적이 없는 남자는 우연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너무나도 눈부신 그녀의 모습에 감정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동시에 여자는 남자가 살고 있는 남자의 집을 보며 정반대의 변화를 감행한다. 완벽하게 혼자인 그는 그녀로 인해 외로움을 느끼고 혼자가 되기를 거부하지만, 외로운 그녀는 그를 통해 외로움을 지우기 위한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법을 터득한다. 마침내 남자는 집을 뛰쳐나와 여자를 찾아간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팔을 잡는 그 ‘접촉’의 순간, 도쿄는 흔들린다. 봉준호 감독은 이 흔들림이야말로 얼어붙은 도시를 일깨울 작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도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타인과의 접촉, 만남, 나아가 사랑인 것이다.

세 편의 공통점은 모두가 도쿄라는 도시의 특수성 대신 다른 도시와 일맥상통할 수 있는 보편성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가 지닌 독특한 풍경들을 담아내면서도 그 속에서 거대도시가 지니고 있는 공통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는 것은 세 명의 감독이 도쿄 내부가 아닌 외부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도쿄!>의 가장 큰 미덕은 세 편의 단편이 고른 완성도와 작품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옴니버스영화의 한계로 일관된 통일성이 없는 산만함을 꼽는다. 하지만 개성 넘치는 단편들로 구성된 <도쿄!>는 적어도 작품들 사이에서 그런 산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재능 넘치는 세 명의 감독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옴니버스영화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