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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중경] 내일은 더욱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중경
장률 감독, 2008년

폭발 직전의 도시, 그 속의 긴장감

“내일은 더욱 좋아질 것이다(明天會更好).”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중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낸 덩샤오핑의 말이다. 중경에서 외국인들에게 북경어를 가르치고 있는 쑤이는 이 말을 학생들에게 작문 과제로 낸다. 그러나 긍정적인 희망이 담긴 말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마치 ‘정말 내일은 더욱 좋아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망종> <경계>를 통해 ‘중심’이 아닌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던 장률 감독이 이번에는 중국의 대도시 중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감정이입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으려는 그의 정직한 태도는 변함이 없다. <중경>에서도 그가 주목하는 것은 발전하고 있는 도시의 외양이 아니라 발전 속에서 도시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 그리고 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는 사람들이다.


감독 스스로 ‘폭발 직전의 도시’라고 밝혔듯, 영화가 그리는 중경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도시다. 대낮의 길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총소리가 들리고, 거리에서 여성들이 태연하게 몸을 팔고, 식당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러도 주변에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곳, 그곳이 바로 중경이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쑤이의 삶 역시 언제 폭발할 지 알 수 없는 긴장에 휩싸여 있다. 그녀는 급격한 발전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소통의 단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소통의 단절은 곧 고독이다. 쑤이가 꿈꾸는 것은 바로 그 고독으로부터의 탈피다.

하지만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은 다 그녀의 희망이 될 수 없다. 그녀가 관심을 보인 한국인 김광철은 그녀와 고독을 공유할 수 있을지언정, 그녀와 사랑을 공유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그는 오래 전 폭파사고를 통해 마음과 몸 모두 상처를 입었다. 삶의 터전을 상실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변부의 내몽고로 떠나는 것뿐이다. 반대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온 경찰 왕위는 오로지 육체적인 관계만을 통해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인물이다. 아내가 있음에도 여러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왕위는 마치 가볍게 사람들을 만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쑤이가 왕위와의 관계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은 곧 진실한 소통의 불가능이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호텔 신에서, 침대 위에서 섹스 돌(sex doll)을 사이에 두고 핸드폰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더 이상의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리의 매춘부들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쑤이가 나중에 매춘부의 손을 잡는 것은 성(性)을 사고 팔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어 또한 <중경>에서 소통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요소다. 언어의 단절은 쑤이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쑤이와 아버지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쑤이는 매춘부를 상대하는 아버지를 경멸하고, 아버지는 중경어 대신 북경어를 쓰는 딸이 못마땅하다. 마침내 아버지는 쑤이를 떠나 재활용품을 모으는 삶을 선택한다. 그것은 발전이 낳은 소통의 단절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가는 또 다른 삶의 유형이다. 집보다 재활용품을 모으는 곳이 더 편하다는 아버지의 말처럼 발전하는 도시 속에서 노인은 내부에 편입되지 못하고 가장 먼저 외부로 쫓겨나는 존재인 것이다.

<중경>을 통해 중국을 바라보는 장률 감독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내 땅과 집을 돌려달라”며 홀로 시위를 벌이던 사람은 결국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철거를 앞두고 시위를 나선 사람들이 부르는 ‘인터내셔널가’에서도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쑤이는 쓸쓸한 눈으로 중경을 바라본다. 변화하는 도시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고, 설령 적응한다고 해도 잃을 것이 너무 많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실체라고 <중경>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 <중경>은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를 소재로 한 <이리>와 짝을 이루는 연작영화다. <중경>과 <이리>를 느슨한 연결 관계로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두 편의 영화는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 봐도 상관없지만, 또한 그렇기에 두 편의 영화를 같이 봤을 때 생겨나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중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리>로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