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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덴마크 판 "가족의 탄생" - <미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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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이 만나서 대안 가족을 만들어 나가는 "가족의 탄생"스러운 영화들은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인기있는 소재입니다. 또는 가족이나 형제를 돌보아야 하는 부담감으로 갈등하는 주인공의 고뇌 또한 익숙한 설정입니다.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동생을 돌봐야 하는 누나라든가, 장애가 있는 형제를 돌봐야만 하는 남자 주인공이라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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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순서로 비슷한 영화들을 나열해 볼까요. 조니 뎁이 정신박약아 동생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책임져야 했던 <길버트 그레이프>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라쎄 할스트롬 감독의 연출도 좋았지만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훌륭했던 영화였죠.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 화려한 캐스팅입니다. 줄리엣 루이스, 메리 스틴버겐, 존 C. 라일리 등등..) 그 다음에는 <러브 액츄얼리>에서 짝사랑하는 회사 동료보다도 정신 질환이 있는 남동생을 먼저 챙겨야 하는 슬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로라 리니가 있네요. 로라 리니는 <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도 부모님이 없는 상황에서 삐딱한 남동생을 애틋하게 감싸안는 역할로도 나오기도 했죠. 그리고 헐리웃 영화를 찾아본다면 더스틴 호프만의 자폐증 환자 연기가 돋보였던 <레인 맨>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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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토리 상으로 보면 <미후네>는 덴마크 판 <레인 맨>이라고 불릴 수도 있습니다. 도시에서 성공한 동생이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형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이 영화의 주요 스토리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두 영화에서 모두 한참 동안 떨어져서 지내온 형제가 다시 친해지고 가족애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따뜻하게 그려집니다. <미후네>의 제목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게 되는데, 주인공 크라이스텐과 형 루드가 어린 시절 사무라이 액션을을 흉내내며 함께 게임을 하던 기억을 더듬어 서로 믿음을 회복해 나가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미후네"라는 단어는 두 형제가 어릴적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키워드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와 <라쇼몽> 등으로 유명한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를 지칭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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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에서 가장 뭉클했던 대사가 바로 "Happiness is when Mifune comes out of the cellar."이기도 했습니다. 자막 번역에서는 의역으로 대충 넘어간 부분인데,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을 가진 듯이 보이는 정신지체 장애인인 형 루드가 동생이 지하실에서 미후네 흉내를 내면서 뛰어나오는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으면서 했던 대사입니다. 동생에게 짐만 되는 것처럼 보이는 형 루드가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었거든요. 온갖 말썽을 피우면서 누나를 괴롭히는 비야크가 사실은 누나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 여린 사춘기 소년일 뿐인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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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후네>는 두 남녀 주인공이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늦가을에 어울리는 로맨틱 무비인 동시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남자 주인공 크라이스텐에게는 정신지체 장애인인 형이 있고, 여자 주인공 리바에게는 사립학교 등록금을 부담하게 만드는 동시에 온갖 사고를 치는 남동생이 있습니다. 이들 넷이 만들어 가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는 방식은 무겁지 않고, 어둡지 않으며 때때로 예상치 못한 웃음까지 안겨주고 있어서 이 영화가 "도그마"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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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산 "도그마" 영화들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셀러브레이션>이나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 등)에서 느껴지던 거칠고, 노골적이며, 뭔가 트라우마 가득한 느낌이 사라진 이 영화는 "Dogma with a smile"이라는 별명이 아주 잘 맞아떨어집니다. 영화의 스타일이, 강렬하다기보다는 잔잔한 감동과 아기자기한 재미를 선사하는 쪽이니까요. 특히나 영화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인데, 크라이스텐 역의 아나스 베틀슨과 비야크 역의 아역배우도 수준급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몹시 귀여운 정신지체 장애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예스퍼 에스홀트와, 북유럽 특유의 쿨한 매력과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는 이븐 야일리(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 에서 존 쿠삭을 애태우게 했던 그녀)는 특히나 돋보이는 배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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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도그마의 규약을 고려할 때, 장르적 느낌이 나는 러브 스토리가 조금 진부하기도 하고, UFO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루드의 캐릭터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업 영화에 비해서는 꽤 신선한 스토리 전개와 뛰어난 연기력이 받쳐주고 있어서 단점들이 보완되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사실 도그마의 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도 하니까요. 특수 효과나 테크놀로지에 기대지 않고, 영화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군더더기 없이 스토리와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를 만들자는 것. 도그마 스타일로, 즉 일체의 특수 효과나 배경음악을 배제한 채로 소박하고 담백하게 촬영된 덴마크의 황금빛 전원 풍경은 영화 <미후네>를 따스하게 보이게 하는 데 한 몫을 해 주고 있고, 도그마 영화치고는 핸드헬드의 어지러움도 그리 거슬리지 않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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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좀더 도그마스러운 영화가 보고 싶으시다면 28일 금요일 저녁 씨네큐브에서 <브레이킹 더 웨이브> 특별 상영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1996 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라스 폰 트리에의 전성기 시절 작품이죠. 이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기만 한데,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기대가 됩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음악이 따로 삽입되어 있던 방식이 새롭게 느껴졌었는데... 마지막에 흐르던 바하의 시실리아나가 아직도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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