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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미후네 (Mifunes Sidste Sang, 1999)



다른 영화 볼 때 봐두었던 예고편에 완전히 낚였습니다. 초라한 과거를 숨기고 부잣집 외동딸과 결혼한 한 남자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골에 내려갔다가 다른 여자와 진짜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인데, 예고편의 후반부는 긴장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그 무엇이었거든요. 99년에 만들어진 도그마 영화라서 과연 어떨까 싶은 정도였는데 그 멋진(?) 예고편에 완전히 넘어간 상태에서 잔뜩 기대를 하고 봤습니다. 그러나 <미후네>는 분명 재미있는 영화이긴 했지만 예고편에서 보여준 긴장 넘치는 후반부 따위는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정도의 내용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실제 영화는 예고편을 통해 예상하게 되었던 것과 달라서 중간에 툭! 하고 끊어지며 끝나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예고편을 미리 보지 않으셨던 분들도 혹시 "어, 이게 다야?"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우는 없으신지 모르겠네요.

원래 제목으로부터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을 유추하는 편입니다만(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제목은 자기 영화의 주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3-4×10월>(1990)이라는 제목을 쓰기도 했죠) 이 '재미는 있으나 요점이 없는'(또는 지나치게 창의적인 예고편 때문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었던) <미후네>라는 작품은 원제목의 의미에서 영화의 요점을 어느 정도 정리해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설정'이 전부이고요,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미후네의 마지막 노래'라는 의미의 원제목에서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 미후네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 <7인의 사무라이>(1954)에도 출연했던 일본 배우 미후네 토시로의 이름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크라이스텐(아나스 W. 베틀슨)이 정신지체가 있는 형 루드(예스퍼 애스홀트)를 달래기 위해 어릴 적에 했던 사무라이 놀이를 재연하면서 관객들에게 소개되는 이름이죠. 즉 미후네는 사무라이이고, 그것은 곧 크라이스텐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이전까지 살았던 삶을 상징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홀로 남은 형을 돌봐주기 위해 가정부를 하나 들이는데 하필이면 코펜하겐에서 고급 콜걸이었던 리바(이븐 야일리)가 등장해서 두 형제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리바의 말썽꾸러기 남동생 비야크(이밀 타딩, 진정한 꽃미남에 연기도 출중한데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출연작이 없네요)가 집안에 합류하면서 나름대로 '사랑이 꽃피는 즐거운 우리집'이 됩니다. 그리고 예고편에 따르면 무슨 음모 같은 것이 드러나면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거나 해야 하는데 영화는 오히려 약간의 소소한 갈등을 거쳐 아름다운 한 편의 멜러 드라마로 안착하며 끝을 맺습니다. 그리하여 사무라이는 시골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끗. 예고편의 긴박감 넘치는 후반부는 영화 전편에 깔린 몇 개의 장면을 짜집기 하면서 영화에는 나오지도 않는 쿵쾅쿵쾅하는 배경 음악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평이한 내용이긴 합니다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 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도그마 95 선언의 3번째 작품에 걸맞게 완전한 자연광으로만 촬영된 화면이 고풍스러운 70년대의 느낌을 자아내는 편입니다. 통속적인 분위기로 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교훈을 강조하려고도 하지 않는 연출은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다소 맥이 빠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낚시성 예고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이것 말고는 더 들려줄 이야기가 없는거냐'고 묻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대단한 음모나 비극적인 결말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크라이스텐의 아내가 다시 나타나 극의 흐름을 한 차례 바꿔주는 전환점이라도 있었더라면 한 편의 멜러 영화로서 좀 더 나았지 않았겠냐는 생각을 합니다.